::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 4/5/2013 ||

다섯 번째 청원: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And  forgive  us  our  debts , as   we  forgive  our  debtors .

*이 청원은 죄사함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나 조건이나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행귀절인 누가에는 죄를 하말티아로 표현했지만 마태는 빚(debt)의 개념을 도입하여서 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용어는 오페이레마를 쓰는데 이것은 금전상의 빚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개역성경은 마태의 빚 (여자적인 의미로)을 죄로 번역했는데 잘 된 번역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죄는 하나님께 갚아야 할 부채로 죄인을 채무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도는 조건적이고 보상적입니다. 자신들이 타인을 용서한 만큼, 또한 공로와 선행을 쌓은 만큼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청원은 우리들의 공로나 행위에 근거하여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구하는 청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이 내게 입힌 손해와 죄를 용서하므로써 공로를 쌓고 그 반대급부로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사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근거나 권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사함을 청구할 수가 있는 조건이나 자격일 뿐이다./요일3:21-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나 권리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우리들이 마음 속에 이웃에 대하여 해묵은 증오와 반목과 갈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죄사함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이웃이 내게 입힌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죄 사함을 위한 조건이나 자격일 뿐입니다. 특권이 아니다. 

*일종의 이 청원은 서약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헬라어 단순 과거형인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번역해 볼 수가 있는데, 아람어로는 완료형이 되어야 한다.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지 않고 단순히 동작이 완료 되었느냐 안되었느냐에 따라서 완료형과 미완료형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이것은 아람어에서는(예수님 당시에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동시적 완료형(perfecticum coincidentiae)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번역은:하나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앞부분은 용서에 대한 청원이나 뒷부분은 일종의 서약(서원)과 같다.

우리들이 예배 드리는 중에 또는 기도하는 중에 이웃이 내게 지은 죄를 용서하지 않아서 그것이 예배 현장에서 생각이 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그 이웃에게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예배를 중단하고 이웃에게 말하고 와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나의 죄를 먼저 하나님께 사하여 달라고 청구한다. 그와 동시에 그 기도의 자리에서 내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서약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기도가 끝난 후에 내게 죄 지은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선포하면 된다. /18:23-35/일만 달란트 빚진 종-그런 일을 못했다. 자신은 어마어마한 부채를 탕감 받았지만, 삶의 현장에 가서는 일백 데나리온 빛진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다.

 

*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원죄와 자범죄! 이것은 원죄에 대한 청구가 아니고 자범죄에 대한 청구이다. 자범죄는 이미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이 삶 속에서 짓게 되는 죄를 말합니다. 마태에 사용된 우리들의 죄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수 개념(단수,복수)을 정확히 표시하지 않는 말입니다.

 

*‘사한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아페스라는 동사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할 때에는 사한다 혹은 용서한다로 됩니다. 용서와 사함에는 어감의 차이가 존재한다. 사함은 면죄을 의미하며 용서는 불벌,면책(벌을 주지 않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는 사함(면죄)이고 죄에 대한 인간의 행위는 용서(불벌,면책)이다. 하나님만이 면죄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동일한 헬라어 동사 아페스가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에는 사한다로 번역되지만 인간에 대하여 사용될 때에는 용서로 번역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번역한다면: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사함의 청원은 불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고 성도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하나님이 보셨고 아셨고 모두 십자가로 이미 용서해 놓으셨다. 과거에 지었던 죄, 현재에 짓고 있는 죄,미래에 짓게 될 모든 죄악에 대하여! 그럴지라도 구체적인 죄악들 하나 하나에 대하여 죄사함을 청구하지 않는다면 이미 사하여진 죄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activate)이 되지 않습니다. 크레디카드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청구하는 이유는 영계에서 이미 용서해 놓은 죄사함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죄사함이 내 삶에 실행이 된다면 죄사함의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만약 내 속에 미움과 복수심, 원한과 증오심을 가득 가지고 있는 채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사하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구체적으로 내 삶 속에 실현되지 않는다. /죄사함의 실현은 마치 저수지에 있는 물이 우리의 집의 부엌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저수지에 있는 물은 용서의 근원이신 하나님( 43:25-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라라)이시고, 그 물이 수도관을 통하여(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부엌까지 운반(13:38-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되며, 수도꼭지를 틀면(우리의 믿음의 기도/5: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물이 흘러 들어온다.

 

*6:14-15에서(주기도문이 끝난 다음에) 죄용서에 대하여 한 번 더 부연된다. 이것은 크리스챤(예수의 제자)에게 있어서 죄용서의 주제는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삶은 용서가 신앙의 마침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에 대한 서로간의 자백이 공동체 안에서는 늘 있어야 합니다. 5;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일방적인 용서가 아니라 싸움과 갈등이 있는 곳에는 쌍방간의 damage가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당사자가 피차용서 해야 합니다,3: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하면서 토나 조건을 달지 말라는 말!)  5:23-24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제단에서 예물(제물)을 드리면서 제사(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이웃이 불편해 하고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분요한 삶의 자리에서는 잊어 버리고 있었지만, 영이 민활하게 움직이는 자리에서는 성령께서 생각하게 하신다) 그것을 해결하고 난 다음에(먼저 해야 할일-화목하게 되라.) 와서 제사(예배)드리라는 말씀이다. / 용서의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스데반(7:60) 요셉(50:15-21), 예수 그리스도(23:34)/ 구약 성경의 삼손?16:28 원수(블레셋)과 함께 죽었다

 

*이 다섯 번째 청원을 하기 싫다면 어떤 삶을 살면 되는가?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왜 서로를 잘 용서하지 못할까? 주기도(복음송)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겠다는 내용이 빠져 있는 채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사함을 청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웃이 자신에게 입힌 죄를 용서해야 한다. 미리 용서해 놓고 자신의 죄사함을 기도해도 좋고, 아니면 기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죄사함을 청구하면서 이웃이 내게 입힌 죄를 용서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 찾아가서 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 된다.

 

*다섯 번째 청원과 관련된 성도의 신분은? 죄인이다./성도는 죄사함 받은 의인이다. 성도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라틴어)로는 Simul  iustus  et  peccator!           /동시에 의인 그리고 죄인/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사도 바울의 고백, 딤전1:15,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죄는 드러나서 나는 죽는다 그러면서 죄사함의 기쁨은 더욱더 커진다./ 내 이웃이 내게 입힌 피해에 대하여 내 이웃을 조건 없이 용서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돈 받고(보상 받고) 용서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점입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고 우리의 의지입니다. 내 원수에게 감정적으로는 미움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의지적으로 주께서 말씀하셨기에 악수의 손을 내미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감정을 미움에서 사랑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여섯 번째 청원: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 but  deliver  us  from  evil :

*이 간구의 핵심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구원(Rescue)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청원은 죄사함의 청원인데 그것은 과거에 focus를 맞추었고, 네 번째 청원은 양식청원인데 그것은 현재에 focus를 맞추었고, 여섯 번째 청원은 미래에 focus를 맞추고 있습니다.  We- Petition에는 크리스쳔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위해서 청구해야 할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우선 전반부에 나오는 단어인 시험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 봅시다. 시험이라는 그릭 단어는 페이라스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어떤 것을 시험,조사,검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어려움이나 함정 혹은 유혹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기도문의 시험은 두 번째 의미의 시험 즉 유혹이겠지요. 유혹은 마귀의 전문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 유익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 시련(페이라스모스)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와 악에 빠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과 삶을 파괴하기 위하여 유혹(페이라스모스)을 사용합니다. /이 땅에 있는 시험은 보편적(널려 있음)이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 자신의 자원으로는 극복할 수가 없다./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는 전반부는 우리를 시험으로부터 면하게(from temptation) 해달라는 간구가 아니라 시험 안에서 보전(in temptation)해 달라는 간구이다. 왜냐하면 시험은 이 세상에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 이 간구는 시험(유혹)안에서 승리를 요구하는 간구이다. 시험(유혹) 안에서 보존해 달라는 간구이다. 우리 주님 예수님의 중보기도(17:5)/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유혹)에 빠지도록 인도하시는 심술궂은 분이 아니다. 따라서 이 번역은 우리를 시험에 드는 일을 허락지 마시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사탄의 요청에 따라서 욥을 시험에 들도록 하나님이 허락했다. 조건을 붙여서!   

 

*오늘 우리 시대에는 어떤 종류의 시험(유혹)이 있는가?/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의 완성이 일어나는 시점까지 사탄은 복병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은 끈기 있는 유혹자(4:13-잠시 떠났다---16:21-23-베드로를 통한 시험/26:14-16-가룟유다를 통한 시험),

*시험(유혹)의 종류는 무엇일까?

          a) 물질 시험(유혹)-돈 버는 재미---- 롯의 경험(14-요단 온 들판을 선택), 롯의 처는 물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 /아간의 경험(7:21 시날 산 외투,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 금덩이를 숨겼다)/가롯 유다의 경험( 30에 예수를 팔아 넘겼다)

          b) 이성 시험,  삼손(드릴라)/다윗(밧세바)/솔로몬(여러 이방 후궁들) vs. 요셉(보디발의 부인의 유혹)

          c) 세상 지위 명예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시험/사탄이 예수께 내게 절하면...모든 세상 영광을 다 주겠다

어떻게 하면 유혹을 이기는가? 유혹(시험)을 이기는 방법

          a).(끈기 있는)기도밖에는 없다/22:40(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주님의 명령)/22:31-32(베드로를 위한 개인적인 중보기도)

          b).피할 길은 깨어 기도하는 자에게는 보인다.-피할 길은 눈 밝은 자는 보고 피한다.

 

*후반부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우선 이것을 전반부와 독립된 청원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전반부에 부속된 청원으로 여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문장 구조상으로 볼 때 부속적인 청원이 되어야 한다. 5째와 6째의 청원은 다같이 접속사(헬라어:카이)로 연결이 되지만 6째청원의 전.후반부는 접속사(헬라어:알라/그러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후반부의 간구의 내용을 동일 범주에 포함시킬 수가 있습니다;지키심(protection). 따라서 전.후반부를 합친다면, 연약한 우리들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게 허락하지 마옵시고, 만약 불행하게도 그러한 유혹에 빠졌을 때에는(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 나오기 어려우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내어 달라는 것이 여섯 번째 청원의 요지입니다.

*악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바르게 번역되었는가를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그릭의 포네루라는 단어를 중성명사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남성 명사로도 번역이 됩니다. 포네루라는 단어 앞에 있는 정관사가 투(그릭)인데 이것은 남성도 되고 중성도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성을 취한다면 바른 번역은 악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 청구의 후반부는 악이라기 보다는 악한 자(사탄=인격적 존재)로부터 구출을 원한다고 보는 것이 바른 이해이다.

 

*악은 형태가 다양하지만, 개인 악이든 집단 악이든, 그 악 때문에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온다. 그 악(특히 인간의 도덕적 타락)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마지막 청원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나님께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짖는 간구이다. 당신은 사탄의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존인가 아니면 인간의 지성이 만든 가상적인 존재인가? 요일5:19(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사탄이 유혹하는 영역은? 인간의 지정의를 포함한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이다/ 이 전 삶의 영역 속에서 예수는 우리를 통치하는 우리의 주(Lord)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 그리고 온 우주가 그의 통치 영역(1:16,20).  당신은 악한 자로부터 확실하게 승리할 것을 믿는가?(요일2:13,요일5:18,요일4:4) 아멘!

 

송영(Doxology):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대개는 어떤 의미인가? 왜냐하면(그릭:호티)이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6가지 청원을 하는가? 왜냐하면때문입니다./왜 괄호로 둘러쳐져 있는가? 후대 사본의 첨가이기 때문이다. 권위가 있는 고대 사본인 시내산(알렙) 사본, 바티칸(B)사본, 베자(D) 사본에는 송영이 없다, 후대의 소문자 사본이 송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주기도문이 예배에서 의전적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본다. E. F. Hill에 따르면 송영부분은 초대교회 예배에서 집례자에 의하여 암송이 되었고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고, 권세는 번역상 권능(디나미스)으로 번역함이 좋겠고,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천재소년

2013.04.07 17:36:47

메시지 음성파일 링크 : http://www.churchboston.org/sermon/0405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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