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204장(새 288장)-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511장(새 314장)-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408장(302장)-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221장(새 246장)-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360장(새 324장)-예수 나를 오라 하네
499장(새 442장)-저 장미 꽃 위에 이슬

1.    죄란 무엇인가? 내가 땅 위에서 짓는 모든 죄악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내가 영적인 죄악인 우상숭배나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어 일컫는 것만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아니라 내가 이웃의 것을 탐내고 훔치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죄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시51:3-4.
*시51:3-4<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편의 배경? 시51편의 표제어를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 죄를 저지른 다음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충성스러운 신하, 다윗의 용사인 우리야를 죽였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 죄를 지었다. 그리고 밧세바가 아이를 낳았다. 적어도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후에 예언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와서 다윗의 죄를 통렬하게 지적했다. 이 때에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서 회개했는데, 그 회개의 시편이 바로 51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다윗은 “하나님께만” 범죄했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오직 주님에게만 죄를 범했다는 그런 말은 정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살인을 교사했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고, 낳은 아이도 죽는 형벌을 당하었다. 그런데도 주께만 범죄했는가?  내가 이웃에게 해를 입힌 것은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고 배상을 함으로써 다 씻어 지는 것이 아니라(윤리적 관점), 또한 하나님께도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신학적 관점). 내가 이웃에게 짓는 모든 죄는 누구에게도 죄를 짓는 것인가? 하나님께도! 죄에 대한 이런 신학적인 이해가 있었기에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 아닙니까?
    / 바로 이 부분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명확한 구분이 생깁니다. 누가 죄를 많이 짓는지 적게 짓는 지 여하에 따라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땅 위에서 짓는 모든 죄가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이해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불신자는 죄를 짓게 되면 분명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연관을 시키지 않거나 못하는 자입니다. 신자는 그 반대로 모든 죄를 반드시 하나님에게로 가지고 나와서 죄용서를 청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불신자와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호가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그랬더니 아들들과 딸들이 유산 상속 문제를 가지고 시비가 붙고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면서 가족 관계는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들 자식들의 싸움이 서로에 대하여 데미지를 주었지만, 더욱 큰 데미지를 받는 분이 누구일까요? 임종을 앞둔 아버지인 부호가 아닙니까? 그들의 싸움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땅에서 우리의 이웃의 것을 훔치거나, 우리의 이웃의 생명을 앗아가거나 하는 일은 당사자에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누구에게도 죄를 짓는 것인가? 하늘에 서서 말없이 보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도 동시에 죄를 입히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특히 하나님의 눈을 찌르는 행위다! 오늘 본문 ‘주의 목전에’라는 구절은 주의 눈 앞에서 라는 의미이지요. 히4:14절<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 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하늘에서 두 눈을 뜨고서 어두움 가운데서, 은밀한 가운데서 짓고 있는 모든 죄악을 보시고 알고 있다. 우리의 죄악은 하나님의 눈을 찌르고 하나님의 눈을 시리게 만들고 있다./ 어떤 참외서리꾼이 참외 밭에 들어가서 참외를 따고 있었습니다. 전후 좌우를 살피면서 한참 참외를 자루 속에 넣고 있었는데, 위쪽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그 아랫 쪽에서 전후 좌우를 살피지 말고 위쪽을 보시오라는 소리! 주인의 외침이었습니다. 형제와 자매, 사람 사람 사이에 일어난 죄악들이 모두 주고 받고 배상,변상처리 됨으로써 죄가 모두 청산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빚은 청산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예화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죄에 대하여, 영적이고 종교적인 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짓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까지도 성도는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 한다.

2.    하나님의 뜻을 어찌 확신할까?
*약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어거늘>/사람들이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신앙을 기저에 두고 계획하지 않습니다. 성도 가운데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신앙과 분리된 내 인생의 청사진을 짠다/ 눅12:13-21절-어리석은 부자 비유-그의 계획 속에는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 어리석은 부자는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해지자 심중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부자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부자가 미래를 생각하면서 머리를 굴려서 자기의 지혜로 철저한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 미래의 계획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사상누각이라고 부르지요. 모래 위에 세운 집! 이런 집은 비바람 이 치고 홍수가 나면 무너지지 쉽상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시는가?  주님께서 왕으로서 내 삶을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의 골방에 가두어 둔 우리 주님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여서 내 마음의 왕좌에 앉혀서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 늘 하나님께 인생의 위기나 혹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중세 시대에 수백년 동안을 편지 마지막, 자신의 이름 바로 뒤에 주의 뜻이면~ D(eo)V(alente)라는 말을 쓰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16: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히6:1-3<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하 데로 나아갈니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무엇일까요? 6가지가 제시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둥이라할까, 아니면 믿음의 토대, 기초는 히브리서 기자는 6가지를 제시했습니다:회개와 신앙, 세례들과 안수, 부활과 심판! 두 개씩 쌍을 이루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은 독자들에게 이런 기초 교리를 버리라고 했는데, 버리라는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런 기초 교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안되지요. 버리라는 의미는 글자그대로 쓰레기 통에 버리고 잊어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지요. 버리라는 의미는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기초 교리에 집착하면서 신앙생활하다가 보면 깊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초 교리를 깨달아 안다음에는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한 단계, 두 단계 더욱 깊고 높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지요. 이런 기초 교리를 집착하지 말고 어디로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숙함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일도 우리 하나님이  하나님이 허락해야 되어 지는 일입니다. 깊은 대양으로 나가지 않고 물가, 얕은 곳에서 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두려움 때문에 신앙의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아 옛날이여 하면서 옛 체험의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관용구 처럼 사용됨-기도하는 자의 겸손을 보여 주기 위한 수사적인 어구에 불과한가? 아니다.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하여 기도하면, 상황과 환경이 그 기도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되어가는 것을 본다. 모든 여건과 환경이 내가 기도했던 것을 이루어 가는 환경으로 만들어져 간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주의 뜻과 의지를 물어야 한다. 아무리 환경이 순조롭더라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 임금의 경우-성전 건축이 솔로몬에게로 넘어갔다. 왜? 성전 건축을 하자면 준비해야 될 일이 많을 텐데 준비가 부족했는가? 아니다. 모든 것은 다윗이 다 준비했다. 주위에 있는 대적들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자신의 왕궁은 예루살렘에 백향목으로 잘 지었지만, 성전은 아직 준비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텐트-이것을 성막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그냥 텐트 안에 있었던 것이 다윗의 마음에는 걸렸지요. 그래서 한시 바삐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자기의 왕궁 바로 곁에 짓고자 했습니다. 왕궁을 헤이칼이라고 부르는데, 이 헤이칼은 성전도 됩니다. 왜나햐면 성전과 왕궁은 서로 붙어 있는 건물입니다. 삼하 7장에 보면 다윗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대적들을 모두 평정한 다음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뜻을 예언자 나단에게 이야기했더니만, 예언자 나단이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왕의 마음을 따라서 성전을 건축해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성전건축을 위한 모든 재원 마련이 끝나 있었고, 또한 평화가 찾아 왔고, 또 성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환경과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니,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건축하지 말라고 계시하시지요.  그 이유는 다윗은 정복 전쟁 때문에 피를 많이 땅에 흘렸기 때문에, 그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립하도록 하게 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평화의 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환경과 여건은 만들어졌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재가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그 일이 위탁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제 1성전을 건축했었지요
/사도 바울 일행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유럽 선교로 방향을 바꾸었지요. 행16:6-10-소아시아 지방에서 계속 뱅뱅 돌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하나님의 뜻에 어긋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것을 막았다. 환경.상황은 옳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유럽 대륙으로 보내길 원하셨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두니아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는데ㅡ 어떤 신분으로 갔나? 죄수의 신분으로 갔다.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려는 열망은 롬1:10절<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13절<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의 고백. 롬15:22-29<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가장 좋은 길을 바울은 찾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죄수의 신분으로 보냈다.

빌2:;13절<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쁜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소원이 일어난다. 이것은 나 자신이 출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출처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거룩한 소원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원이 내 마음에 생겨 나면 다음에 하는 일은 기도하고 간구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음에 소원을 품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십니다.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는 거룩한 일을 하실 때의 공식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거룩한 소원을 넣어 주신다음에 기도하게끔 만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 구원의 일들을 성취시키십니다.
/당신은 이곳 보스톤 땅에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당신의 사명과 비전과 보스톤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주의 뜻인가? 바울이 그토록이나 가고자 했던 로마! 나의 로마는 어디일까? 이곳 보스톤이 나의 로마인가? /나의 간증? 나는 확실하게 나의 로마는 보스톤 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보스톤 땅이 나의 목회 사역의 종착점이 아니라 지나치는 정류소라고 생각했다. 보스톤 땅을 전혀 몰랐지만, 등 떠밀려서 이곳에 왔지만, 이곳이 나의 사역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거룩한 사명을 다 이루도록 내 삶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보스톤 땅에 왜 왔는가? 육신적인 목적을 가지고 왔지만, 이곳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비전, 내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내 삶을 일어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보통 유목민들의 이동과 다를 바 없었다. 좋은 목초지를 따라서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따라서 이동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갔다. 표면상으로는 다른 노메드, 다른 유목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중심 속에는 그의 가슴 속에는 그의 영혼 속에 품고 있던 것은 달랐다. 하나님의 약속을 품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품었다! 우리도 이와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 보스톤 땅에서 비록 육신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곳에 왔지만, 이곳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무엇일까?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가 되는 일 말입니다. 꼭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얼마든지 나는 선교사가 될 수 있다. 내 직업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학교를 마치고 학위를 받으면 보스톤에 남을 사람은 남아서 교회에서 하는 선교 사역에 힘쓰길 바랍니다. 또한 직업을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시면 그 보내시는 곳에서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 찾기를 바랍니다. 보스톤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기도하고 찾아 내기를 바랍니다.


/행18:21-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돌아 오리라!
고전4: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고전16:7-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약4:15-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
/히6:3절-우리가 이것을 할 것이다. 이것을? 2절의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을 가르킨다/영적인 성숙으로!  엡4:15-예수에게까지 자라나라,  벧후3:18-자라가라!
       



송주석

2013.12.10 15:01:56

메시지 음성파일 링크 : http://www.churchboston.org/sermon/1206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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