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1. 막1:40-42절/우리 주님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에서 일어난 일/나병환자(한생병, 문둥병)를 치유하신 사건
*한 나병 환자의 간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누구의 원함인가? 예수의 원함! 나병 환자는 당연히 자신이 병이 낫기를 바람과 소원과 원함을 가지고 있다. 병은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 나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향/ if you are willing~you are able to clean me! 예수님의 의지와 원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지, 예수께서 하실 수가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 가를 묻지 않았다. 이미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자신의 병을 고칠 수가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있었다. 여기서의 간구는 예수께서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아닌가를 물었다. 예수께서 원한다면 곧바로 나을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나병환자로 일생을 마쳐야 한다. /나병 환자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하나님께 나와서 우리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이런 믿음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나아와서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나님이 나의 기도 제목을 응답 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을 묻고 있지 않던가요? 의심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하실 능력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묻는다.
/누구처럼?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께 와서 간구할 때에 했던 말? 막9:22<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당신이 내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가정법을 사용했다./ 나병환자와는 큰 믿음의 차이가 난다.  귀신 들인 아들을 둔 아비는 당신이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지 없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치료해 주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무시하고 있다./우리가 예수라면 어떻게 반응? 어 이것보게 나를 무시하네, 내가 이 일에 전문가인데, 나의 전문가적인 능력을 무시하는 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겠습니까? 에라 엿먹어라하면서 돌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유명한 의사에게 환자가 찾아와서 당신 나를 치료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이 있으신가?. 내가 볼 때에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그 의사는 대단히 불쾌하겠지요. 어 이것 보게 나를 무시하네하는 마음과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이렇게 되면 그 의사가 환자를 고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쌍히 여겼습니다. 23절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는 예수께서 이 일을 하시고도 남는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능력이 충만한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기도하러 왔다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께서도 전능하고, 또한 예수께서 주시는 믿음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모든 일에 불가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Impossible,단어에서 어포스트로피가 I와 m사이에 들어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I’m possible!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퍼스토피!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 오시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책망에 그 아이의 아비가 외치는 말은 24절<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니라>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 믿음을 달라는 기도가 아닌가? 믿음을 타고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다. 이 믿음을 타고 병을 치유하는 우리 주님 예수의 능력이 흘러 들어오면 낫는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안 아비가 철저한 무력감을 경험하면서 외치는 단말마적인 비명!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 /이 기도를 받으시고 25절에서 우리 주님이 귀신을 추방함으로써 그 아이를 치유하지 않았던가요?
*그 나병환자! 우리가 배워야할 신앙! 몸은 나병으로 문드러져 있지만, 신앙은 아주 건강하다. 우리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나병환자처럼 뭉그러져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주님이 자신의 병을 고칠 마음이 없다면 자신은 일생동안 그렇게 살겠다는 말이 아닌가?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가정과 공동체로부터 분리(격리)시킵니다. 마을 밖에서 나병환자들끼리 끼리 모여서 삽니다. 밀려 오는 고독감! 가족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가정과 공동체로 돌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평생을 고독감을 안은채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떤가? 우리 주님을 욱박질러서 우리의 원하는 것을 가질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뗑깡 쓰면서 부모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 낸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부모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모의 원함을 존중해준다.
/이런 믿음을 우리는 다니엘 서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서도 발견한다. 단3:17-18절<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도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하나님이 자신을 풀부불 가운데서 건져 낼 수 있는 신 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신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기를 원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과 의지의 문제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응답되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기도 제목에 대하여서도 이런 말씀으로 응답해 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 밖에 살아 계신 실존이시고, 동시에 전능하신 분이라는 반드시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뿐이고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원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서 나의 이 기도 제목에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지를 오늘 물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불쌍히 여기심/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면서~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 누구를 불쌍히 여기셨는가? 그 나병환자를! 자신 앞에 꿇어 엎드리어서 간구하고 있는 그 나병환자를~ 여기에 사용된 동사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라는 동사다.  이 동사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동사가 사용된 구문을 모두 조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요. 그 동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 지를 조사해야만 그 동사를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스플랑키조마이라는 동사가 사용된 구문으로는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일만 달란트 비유와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에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에서 주인은 종에게 네가 빌기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다하시면서 1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는 action을 취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는 사마리아인의 강도 만나서 땅에 길게 누워 신음하는 그 사람를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하면서 그가 했던  action을 나열하고 있습니다.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소독해 주었고, 그를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리고 갔고, 길을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떠났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집 떠난 아들이 집으로 귀환하자 아비가 그 돌아 오는 아들을 불쌍히 여겨서 달려가서 맞아 주었다. 그리고 했던 action은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소를 잡고 염소를 잡고 잔치를 벌렸다.  스플링크니조마이는 감정적으로 동조할  뿐만 아니라 또 무엇까지 했는가?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행동까지를 했다. 이 단어는 거 참 안됐구나하는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행동을 하는 것 까지를 포함합니다. 독자가 죽었기에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성읍 밖으로 장례 행렬을 울면서 따라 오는 과부! 나인성 과부입니다. 그 과부의 아들인 죽은 청년을 우리 주님이 살려 냈지요. 눅 7:13절에는 우리 주님이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리고 어떤 action을 취합니까?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하시면서 그를 살려 내셨지요. 우리 주님이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심은 그 청년을 살려 냄으로써 완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간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주님의 마음에 불을 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것,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넘치도록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아 낼 수 있다! 주님이 나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셔야 기도 응답이 있다. 내가 하는 행동거지가 우리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길 만 한가? 오히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보시면 어쩨 쟈는 저 모양 저꼴인가하면서 혀를 차신다면 기도 응답은 고사하고 욕이나 실컷 먹지 않겠는가? 우리 주님의 마음에 불을 지를 만큼 한번 진리를 따라서 믿음을 따라서 살아 보라! 그렇게 살려고 힘쓰는데 힘이 부쳐서 쓰러져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으면 우리 주님이 내가 여기있다하시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       


2. 마7:7-8절/기도에 대한 교훈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병렬법으로 나열 되어 있는데, 삼중적인 의미는 한 가지=기도하라는 의미!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리라는 말인가? 13,14절에 나와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산상보훈은 마5,6,7장(세장)으로 되어 있는데, 산상 보훈의 결론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12절 말씀인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황금율을 실천하라는 데 두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동을 한번 하고 끝내는가? 아니다 계속적으로 해야 한다. 언제까지? 바라고 원하고 필요한 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 계속해서 같은 기도를 해야 한다(현재형꼴).
 /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할 수 밖에 없는가? 비유를 들어서 설명! 8-9절에 나와 있는 육신의 아비들도 자기 아들과 딸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줄 사람이 없고,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 없다. 육신의 아비들이 악하다고 할지라도 자기 들의 새끼들에게는 선하게 행동을 한다. 과일을 달라고 하면 예컨데 사과 가운데서 제일 잘 익은 것을 아들에게 주지 않는가? 포도라고 하면 까맣고 윤기 있는 잘 익은 것을 자식에게 주지, 푸르딩딩한 것을 주지 않는다. 농산물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을 자식에게 주고 찌꺼기, 자투리는 당신들이 먹는다. 이것이 세상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즉 천부께서는 선한 분이시기에 그의 아들과 딸들인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는가? 그런 세상 부모의 사랑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얼마나 더욱 그에게 구하는 아들과 딸들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는가? 명쾌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목적어가 없기에 목적어를 다음 단락에 나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문귀와 연결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번 부흥회에서는 세상 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마 6:3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기도 제목으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겠지만, 아직 그런 위치에 도달하지 못한분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의 문맥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세상 적인 것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생명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온 마음을 쓰지 말고, 우리의 온 마음을 쓰는 것은 비록 굶어서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무엇을 구하라고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는 일은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뒤집혀 지기 전에는 결코 일어 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가질 거룩한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주를 믿어서 구원 받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던가요? 이런 일에 대하여 불 같은 소원이 일어나던가요? 또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인데 그 나라가 이 땅에 예수의 재림과 함께 올 것인데, 그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어서 속히 오게 해달라는 것에 우리의 삶이 전부 고정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져 있는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려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어 있나요?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다가 받는 고난과 눈물과 핍박을 받아도 좋다는 그런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나요? 바로 이것이 마6:33절 말씀이 말하고 있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의 마음에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대한 열망보다는 영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그런 거룩한 소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 그러나 우리들이 병들어 있기에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고 우리 주님이 하신 기도의 명령에 배치과 되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내일 먹을 거리가 없어서, 아니면 내일 렌트 비를 못내서 바깥 추운 곳으로 좇겨 나야 한다면 그것을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는 것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것이기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카테고리에 들지 못하는 저급한 기도입니까? 아니지요. 우리의 필요를 위한 간구는 무엇이나 정당하고 옳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이나 기도 제목을 삼아서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한 말입니다. 비록 육신적인 것이든, 기도의 제목이 신령한 것이든 무엇이든지 우리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지향하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영적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소유하기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합니다. 돈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것은 분명히 육신적인 간구이지만, 이것이 영적인 간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을 벌려는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면서 남에게 기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돈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그것은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간구입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사들을 돕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주의 몸된 교회에 헌금하기 위하여 돈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영적인 간구입니다. 비록 기도 제목은 육신적인 것이지만 마음의 동기가 영적이고 선하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훌륭한 간구입니다. 그런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사람들은 육신적인 기도, 이방인이 구하는 기도라고 치부할 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훌륭한 기도로 받아 주십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신령한 기도 제목들, 예를 들면 예언을 하고 방언 은사를 사모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을 구하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육신적인 간구가 되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말입니다. 비록 기도의 제목은 신령하더라도 기도자의 마음의 동기가 저급하기 때문에 그런 기도는 모두 육신적인 기도 입니다.
*우리들은 육신을 입고 있기에 육신의 필요를 따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신적인 필요를 따라서, 돈을 구하고, 직장을 구하고, 학위를 구하고 ,높은 지위를 구하고, 배우자를 구하고, 병낫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영적인 차원에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는 동기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그것을 얻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주십니까? 좋은것, the best를 주십니다. 마7: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설의법-좋은 것으로 준다!  이 말씀의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1:1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무엇을 준다고 했습니까? 성령을 준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구하는 자들입니까? 성령을 달라고, 신령한 것을 달라고, 성령의 열매를 기도 제목으로 삼아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고 했나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이 육신적인 것, 세상 적인 것, 우리의 생존에 그것이 없으면 살아가기 무척 힘든 필요한 것이 urgent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거기에 매달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이 시점에 우리의 눈에 들어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육신적인 그것이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영적인 것을 간구할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육신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가 영적인 것에 눈을 돌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이 있기 전에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뒤집어 놓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뒤집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현재의 심령 상태로는 하늘의 것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의 세속적인 것을 붙들고 하나님께 들어가서 달라고 청구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동기와 의 도를 깨끗하게 가지고 힘껏 기도하다가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가 모두 살아지고 심령에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 내가 간구한 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보다는 내 기도 제목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말하게 되지요. 간구했던 돈 주시요, 간구했던 육신적인 질병에서 회복되게 해 주시요. 이런 육신적인 간구들 말입니다.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간구한 육신적인 간구 대신에 부어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 강림을 통하여 무엇을 우리가 얻게 되나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비로소 그동안 그렇게 말을 많이 해 오던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몸으로 느끼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덤으로 무엇을 얻습니까? 나의 육신적인 기도 제목도 덤으로 얻게 됩니다.  마6:33절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이 간구했던 세상적인 기도 제목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게 되면 심령이 뒤집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음부터는 세상적인 것보다는 무엇이 기도의 핵심이 될까요? 영적인 것이 먼저 기도가 되어집니다. 현재 육신적인 것을 기도 하고 계시는 분들은 마음의 동기만을 깨끗하게 가지면서 계속적으로 그 육신적인 것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어느날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바뀌게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 일은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심령이 성령으로 뒤집히고 변화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육신적인 일은 어떻게 되나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이 있어야 함을 아시기에 간구하지 않더라도 성령을 부어 주신 후에는 그런 육신적인 것을 간구하지 않더라도 덤으로 채워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 육신적인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하늘 아버지께서 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덤! 우리는 구약의 솔로몬 임금의 간구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만 간구한다면, 내 삶에 필요한 모는 세속적인 것은 덤으로 얻는다.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냥 얹어 주신다. 왕상3장-장수도 부도 원수멸망도 구하지 않고 지혜를 달라고 구했을 때에 간구하지 않았던 부귀영광도 덤으로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the best를 주시지 second best를 주시지 않는다. 최고의 것을 주신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노릇하게 만들라. 아버지로 하여금 아버지 노릇하게 만들라/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응답의 첩경이다. 하나님은 주어서 기쁘고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받아서 기쁘다. 상생!



송주석

2013.11.21 18:39:48

메시지 음성파일 링크 : http://www.churchboston.org/sermon/1115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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