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To whom? 주 예수께! – 고전10:3-6

*이 가을에 우리가 드리고 싶은 기도!-돈을 달라, 세상 권세를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세상 것 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불복종하고 불순종하는 내가 좀더 우리 주님께 온전하게 굴복하고 복종하게 만들어 달라는 기도이다. 왜? 우리 주님께 우리들이 의의병기로 사용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기도를 무슨 기도? 영적인 기도!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의 싸움은 육신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4절 전반부! 우리들의 싸움은 어떤 싸움? 성전? Holy War? 아니다. 옛날 십자군 전쟁이 중세 카톨릭이 성전으로 포장하여서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하여 싸웠던 타락한 육신적인 전쟁이다. 우리들이 싸워야 하는 싸움은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싸움이 아니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과 영의 싸움인 영적인 싸움이다. 싸우는 무기? 육신에 속한 것=육적 무기.  총과 칼과 손과 발, 입의 말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리고 우리의 육신으로 만져지고 느껴지는 그런 무기가 아니다. 우리의 육신이 체감하지는 못하지만 영적인 차원의 무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손에 들려 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데,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의 성격에 대하여,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2:2절에는 사탄과 악영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공중파! 이 공중 권세 잡고 있는 악한 자들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묘사해 놓고 있지요.  우리의 싸움은 영적 전쟁!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해야하는 전사들! 우리의 신분?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스도를 위하어 싸우는 군사들!

*우리는 예수를 누구라고 부르는가?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내 삶의 왕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인데, 우리는 예수께 할 수만 있으면 불복하고 싶어한다. 예수의 탄식? 너희는 나를 주라부르면서 나를 따르지 않는다!-중세 의 독일의 뤼벡이라는 교회의 낡은 벽에 붙여져 있는 작자 미상의 유명한 시의 한 귀절입니다. /예수께 복종하고 순종하고 헌신하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있다.우리의 영은 변화되었으나, 아직도 육신에 속한 것은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탄이 그 꺼지지 않은 불씨에 부채질 하면 그 불이 다시 붙어서 우리의 영을 위협하는 그런 상황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주님께 불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하여 내가 깨뜨리고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4절 후반부와 5절 말씀<모든 이론을 무너 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니>-세 가지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교만한 마음을 무너 뜨리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사상들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우리가 굴복되어야 할 첫 번째 것은 우리의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교만이 무엇입니까?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힘과 내 능력이면 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내 힘과 내 능력을 의지합니다. 내 삶의 영역에서 나의 삶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자는 바로 나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신약에는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독립하여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고 했습니다. 구약에는 바벨탑 사건은 집단적인 탕자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배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굴복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고집과 편견입니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라고 했는데, 이론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Theory, 법칙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들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원칙,원리를 가리킵니다. 집에는 가훈이 있고, 학교에는 학훈이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원칙은 모두 다릅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분일수록 삶의 원칙이 분명한 분들이 많습니다. 삶의 원칙이 너무나 강해서 그것을 마치 철칙처럼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내가 설정한 삶의 원칙을 따라 살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고수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가하면 형제의 죄를 7번 정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 용서하리까? 7번 하리이까? 7번 정도면 많이 했다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자기에게 7번이나 죄를 짓고서 찾아와서 용서를 청구하면 7번까지는 용서하고 8번째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런 삶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번이면 참 크지요.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뭐라고 하셨던가요? 그래 그 정도면 되었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아니지요. 70번에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요. 베드로가 설정해 놓은 삶의 원칙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랬더니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너무도 높은 차원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기에 무엇을 제자들이 우리 주님께 요구하던가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의 현재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습네다라는 대답이지요. 더 높은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현재의 우리들이 설정해 놓고 있는 우리의 삶의 원칙, 일종의 우리의 고집과 아집을 모두 부수고 더욱 높고 깊은 삶의 원칙으로 갱신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 영적 성숙! 
/원칙이나 원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철칙이다 하면서 고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리나 원칙을 너무나도 엄격하게 적용하다가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게 됩니다.  원칙을 고수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흐르게 하라!  우리 교회에도 원칙과 원리가 이제는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서 교회를 다스리고 섬기는 원칙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세우진 원리와 원칙을 지켜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원칙과 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가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 원칙을 잠시 잠재워 둘 수가 있어야 합니다. 원리와 원칙이 하나님의 은혜 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지 원리와 원칙을 섬기는 자들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세운 원칙과 원리 때문에 우리 주님을 막는 그런 우매함이 없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세운원칙과 원리를 잘 지켜 나갑니다.  세운 원칙과 원리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두는 성도는 더욱 성숙한 성도입니다. 
/싸우고 깨어지고 갈라지는 교회에는 예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가 싸우다가 둘로 갈라지는 교회에 가보면 서로가 주장하는 바가 주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주장이 주님이 되어 있지, 예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은 예수의 뜻을 받든다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뜻이 아니고 자기의 주장, 자기의 원칙, 자기의 원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주님이고 예수입니다. 
세 번째로 굴복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도 이 고정 관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살던 사회 안에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통념 속에서 우리는 자라났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그런 사회적인 고정관념들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내 삶의 전부를 이런 고정 관념, 사회적으로 옳다는 가치관이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고정 관념은 깨어서 무너뜨려야 합니다. 내가 가진 고정 관념이  얼마나 silly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후라이팬과 25cm이상의 물고기!  이런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그 큰 성경의 진리를 내 안에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작은 것 밖에 담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가 유대주의, 즉 유대교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바뀝니까? 다멕섹으로 가던 길에서 그의 고정관념, 그의 고집이 꺽여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그의 잘못된 관념, 유대주의를 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네 번째로 굴복되어야 할 점은 내 욕망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리는 매일 매일 세속적인 욕망을 따라서 삽니다. 이 욕망 때문에 그릇 행하여 우리 주님을 뒤에 두고 내 길을 가게 되지요. 돈을 벌려는 욕망 때문에, 돈 따라서 사업 따라서 살기도 합니다. 욕망, 탐심은 다양합니다.  야망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명성을 얻고 높은 자리에 나아가려는 야망 말입니다. 대형 교회를 만들어서 목회에 성공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런 것들은 목사들의 야망입니다. 주님께 영광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야망과 욕망도 굴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야망과 욕망을 내려 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우리는 이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의 원함(바람)이 무엇인가? 아침에 있을 십자가지는 일을 피하는 일입니다. 시시 각각 다가오는 십자가 형틀의 고통! 이것을 피하고 싶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나 그것을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확신하기에 자신의  바람(욕망)을 굴복시키셨다. 위대한 굴복! 나는 이것을 원하지만,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저 것을 하라고 명하시기에 내 뜻과 의지와 바람과 욕망을 주님께 굴복시킨다. 이것이 헌신이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희생하고 주님께 드릴 때에 그 희생이 빛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공부를 하고, 이런 직업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은데, 우리 주님은 날 보고 세속 직업 버리고 내 종이 되어서 목사가 되라고 하신다, 또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라고 하신다면 내가 굴복할 수 있는가?나의 미래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내가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굴복시켜 주셔야 그 길을 갈 수 있지 않은가?

*1904년 영국 웨일즈 부흥운동/이반 로버츠(Evan Robets)라는 26살의 청년에 의하여 몇 달간 반짝 거리면서 영국의 웨일즈의 한 고을에서 일어났다. 하늘 저 위에서부터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전 세계로 퍼저 나가게 되었다. 20세기 부흥운동의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이 부흥 운동은 1906년에 인도 카시아 부흥을 촉발했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이반 로버츠라는 청년이 26살 때에 자기의 고향 <로우골>의 교회에서 일으킨 불이 세계로 뻗어 가게 되었다.  로버츠라는 이 청년는 12살 때부터 고향 땅인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기도해 오던 중에 26살 때에 셋 조슈아 목사님이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집회의 주제 말씀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주제가 다름이 아니라 ‘오 주님, 나를 굴복시키소서!’입니다. 이 메시지가 이반 로버츠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그 다음날 고향 땅, 웨일즈의 로우골 교회에서 말씀을 전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여서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부흥이 몇 달 만에 사그러 드는 약점이 있었지만, 그 부흥의 불길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은사에 치중하다 보니 말씀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반짝 빛나다가 그냥 사그라 드는  결과를 맞았다. 말씀이 강조 되면서 은사 체험들이 말씀의 바탕에서 받았다면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터인데, 불과 1-2달만에 불은 꺼지고 말았다.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세상으로 나가려는 내 마음을 꺽어 주소서! 그리고 세상이 우리 주님의 복음 앞에 굴복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어디서? 이곳 보스톤에서 말입니다! 복음은 보스톤에서 뻗어 가야 한다. 미국의 정신, 청교도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이곳에서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나와야 한다.  

*우리의 고정관념, 우리의 삶의 원칙, 우리의 고집, 우리의 욕망,우리의 원함, 우리의 뜻이 꺽이고 주께 굴복시켜 달라는 간구가 있다면 우리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실 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만들어져 있는 견고한 진지들-하나님을 대적하는 진지들-무엇이 무너 뜨리는가? 성령의 능력! 이것 밖에는 없다. 우리 주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보내신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주님께 굴복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 능력이 없다. 주님께 나아가서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라고 간구하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신다. 그러면 굴복할 수 있게 되어진다. 


송주석

2013.10.29 21:03:12

메시지 음성파일 링크 : http://www.churchboston.org/sermon/1025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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