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60     

금요기도회 :10/10/2014

대표기도:

찬송가:395(342),복음송<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1.             신앙 생활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일석이조 혹은 도랑치고 가재잡고(마6:33절-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왕상3:4-15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릴 때에 밤에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했고, 솔로몬이 그 때에 구했던 것은 지혜였다.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간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다. 특히 13절은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의 눈으로 내 자신을 살피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 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간구하면 다른 것들도 덤으로 주어진다. 영적인 지혜는 성령으로 인하여 깨달아 알아 집니다. 왜냐하면 고전 2:10절에 의할 것 같으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라’ 그 보혜사 성령님, 진리의 성령님을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성령님이 내게 얼마만큼 충만하게 계시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성령님을 내게 한량없이 많이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매일 매일 우리 주님의 기름부으심, 즉 성령님이 오늘도 덧대어 지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자라나자! 그러면 우리 주님이 보시는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도가 달라지게 된다.  손 안대고 코 풀기=땅 짚고 헤엄치기: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롬8:14-‘무릇(가르-왜냐하면)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요10:4절-‘자기 양을 다 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양들이 우리에 들어 있는데 우리에 있는 자기 양떼를 끄집어 낸 후에 양떼를 목자가 초장으로 인도해 갑니다. 양떼들은 어떻게 하나? 앞서 가시는 목자를 따라 간다. 돼지를 이동시킬 때에는 정반대로 한다. 돼지 몰이 꾼이 회초리를 들고 돼지 뒤에서 따라간다. 그러나 양떼는 그렇게 몰고 가지 않는다. 목자가 앞서 간다. 그러면 양들이 목자를 따라 간다. 이것이 성공적인 신앙생활하기 위한 대강령(지침)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미래의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는가? 그냥 즉흥적으로 행동하는가? 아니다 주도 면밀하게 장래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계획이 어디서 와야 하는가?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계획 단계에서도 주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일에 대한 영감은 그 일의 비전이나 계획 단계에서부터 있어야 한다. 외부 상황에 따라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 가면서 일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획 단계에서부터 그리고 실행 단계에도 그리고 완공 단계에서도 철저하게 주를 의지해야 한다. 주께서 움직이시면 따라 가고 주께서 침묵하고 계시면 가만 있으면 된다. /구약-광야 생활 하는 동안 구약의 백성은 그렇게 살았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이 발행했고 구름이 머무르면 이스라엘은 유진했다. 구름은 무엇을 상징?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민9:15-23, 출40:36-38<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 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 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 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구름기둥은 출발 신호입니다. 머물러 있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행군을 해야 합니다. 떠나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성막위에 머물러 있다면 행군을 멈추고 기다려야 합니다. 구름 기둥은 출발 신호!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에서 살면서 42번 진을 치며 옮겨 다녔다고들합니다(?) 단 한번도 모세 마음대로 움직일 때가 없었습니다. 어떤 경우도 12 족장들과 회의를 한 때가 없었습니다. 오직 구름 기둥만을 따라 갔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따라가는 공동체라는 점과 관련하여서 교회는 민주제도를 따르는 곳인가? 교회는 민주화 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복음화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공동체가 듣고 그 음성을 따르는 곳입니다. 회의를 하여서 중지를 모아서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모인 무리들이 모두 기도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낸 후에(모두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기에 퍼즐을 맞추듯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이 여러 사람의 기도 응답으로 모여서 완성된 그림이 된다) 그 뜻을 따르게 됩니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 되지도 않은 민주화 바람이 불어서 교회가 사람들의 어두움을 타고 난장판처럼 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민중의 뜻을 따르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받들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의 id? 우리는 예수의 종이다! 종들이 주인이 앞에 서 계시는 데도 자기의 생각을 관철할려고 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진리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는 교회들에는 주님이 없다. 자신들의 주장과 자신들의 생각이 하나님이 되어 있지요. 자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를 결집하고 교회를 찢지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셨다는 진리를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갈5:13절<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바울에게는 율법이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로 세상 가운데서 자유를 누리게 하려고 불렀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잘 못 이해했기 때문에 자유가 방종인줄 알고 있다. 방종이란 무엇이나 해도 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자유란? 우리는 우리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우리 주님을 섬기는 종노릇 해야 하고, 성도를 섬기는 종노릇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자유다. 사랑으로 종노릇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놀라운 진정한 자유는 아이로니칼 하게도 예수의 종이 될 때에 나타난다. 시116:16절<나는 주의 종이요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습니다.> 벧전2:16절<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악을 가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악을 행할 때에 자유를 핑계로 삼는다. 내가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 자유는 그리스도의 종이 됨에 있다. 매였으나 자유로운 자!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종노릇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노예의 고백-주인이 돈으로 나를 노예시장에서 사서 자유하게 했다. 나는 일생 동안 이제 내 주인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종노릇하리라! 어떤 자유? 갈5: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율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라고 있습니다,  히2:14-15절<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예수께서 우리 인생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인생들 누구에게나 있는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이다./모든 사람의 뜻이 같을 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면 교회는 모든 사람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교회는 여론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마10:28절<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진정으로 인생이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경외는 공포가 아니다. 내가 주님의 손목을 굳게 잡고 가랴? 아니면 주님의 손에 내 손목이 굳게 잡혀서 걸어가랴? 어느 것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일까? 찬송가 194장(새260장) 4절 가사는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영원히 즐거운 천국에서 주함께 살겠네’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았다. 틀린 것은 아닌데 부족함을 볼 수 있다. 세살 배기 어린애인 내가 손으로 어른이신 예수님의 손목을 못 잡는다, 잡을 수 있는 것은 새끼 손가락 정도이다. 내가 예수의 새끼 손가락 잡고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부딪히거나 발을 헛디뎌서 구덩이에 발이 빠지면 어떻게 될까? 내가 손을 놓게 된다. 그러면 땅 바닥에 넘어지게 된다. 이런 신앙생활하기 보다는 주님의 큰 손이 어린아이와 같은 내 손목을 잡아 주시고 길을 걸어 간다면 어떻게 되나? 넘어 지지 않는다. 돌부리에 걸려도, 구덩이에 빠져도 우리 주님의 강한 손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죄에 빠지거나 실족하지 않는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예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종이다. 이사야 42장 1절<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예수께서 3년 공생애에 실족한 적 있던가? 없다. 모세도 실족했고, 엘리야도 실족했고, 다윗은 말할 것도 없고…그러나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실족하지 않았다. 사두개인, 바리새인,그리고 헤롯당 등등의 모든 적대 세력들이 예수의 주변에 있었지만 단 한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왜? 우리 하나님이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내 손목을 굳게 잡으신다는 표현은 주님으로 하여금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게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운전했다. 지금부터는 내 인생의 운전대를 누구에게 드리는가? 예수께 드리는 일이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예수께 드리고, 나는 어디에 앉는가? 조수석! 즉 passenger side에 앉는다. 이것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님이 나를 안전하게 천국 문 앞까지 인도해 가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갈 수가 있다. 힘이 들지 않는다. 내가 운전석에 앉아 있고, 우리 주님을 조수석에 앉혀 놓으면 힘이 든다. 주님과의 교제도 나눌 수가 없고, 또한 주변 경치를 즐길 수도 없다. 내 인생을 내 뜻대로 해 보라고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따를 것이다. 천국이야 들어 가겠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주님으로 하여금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게끔하라 예수를 내 편으로 끌어 들일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주님 편에 설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내가 이러 저러한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 내 편이 되어 주셔서 승리하게 하옵소서!-우리 이런 기도 많이 하지요. 내편이 되어 달라는 기도! 과연 이런 기도가 옳은 기도이고 바람직한 기도인가? 이런 기도 보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는 간구가 바른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냄새나고 추하고 더럽고 어두운에 꽉 차 있는 내 생각을 따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쁜 뜻을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 뜻을 따라 주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성공적인 신앙생활, 성공적인 기도생활이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설 때에 주님이 내 편이 되어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시절-북군이 남군에 비하여 열세 였지만 아브라함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북군의 참모들이 링컨에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셔서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고 말하니깐 링컨이 이런 말을 하지요: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섰기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셔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깨달아 알아야 진리 편에 설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요일, 수요일 성경 공부하러 나오기를 바랍니다. 누가 복음인가? 내가 복음을 읽고 있는 분들은 모두 내가 복음서를 접고 누가 복음을 읽기 바랍니다. 누가 복음인가? 예수가 복음입니다. 예수의 뜻이 복음이지요. 요4:16-18<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수가성 여인에게 남편이 6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모두 남편이 아니고 그냥 편의상 함께 살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가성 여인이 예수를 만났다. 내가 수가성 여인이라면 무슨 기도를 할까? 여섯 번째 남편을 갈아 치우고 일곱 번째 남자를 달라. 그래서 여기에 물길러 나오지 않아도 되는 남편이면 좋겠다. 재력이 있고, 나의 육신적인 필요인 물길러 나오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주는 남편 말입니다. 그런 남편이 누구? 일곱번째 남편이 되겠지요. 나의 육신적인 요구와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일곱번째 남편입니다. 일곱번째 남편이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아이들 공부잘해서 IVY리그에 속해 있는 학교 들어가는 것, 등등의 일들이 아닌가? 예수를 영과 영으로 만나게 되면 일곱번째 남편 달라는 간구는 안합니다. 기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를 똑 바로 만나게 되면 육신적인 간구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을 바로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주 예수의 물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파스/모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케리규마(선포)입니다.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것을 후대에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수가 있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indicative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어떤 반응을 가지는가?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수용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네가 현재 믿고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마리다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믿고 있기는 있는데, 다시 사는 일은 역사의 종말에나 있는 일입니다. 현재에 다시 사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이 하실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요.  바리새인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역사의 종말에 모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을 마르다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산다는 말을 하셨는데…/모든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믿음으로 수용해서 삶에 적용하면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다. 바울의 사상은  indicative+imperative로 구성되어 있다. 이론, 진리가 선포되고, 그 다음에 <그런즉, 그러므로>라는 인과 접속사가 따라오고 너희는 이렇게 살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mperative!는  우리의 삶에 적용입니다. 진리가 이러니 너희는 이렇게 살라! 진리가 저러니 너희는 저렇게 살라!  오늘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으로부터 진리를 찾아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열어서, 읽고, 깨닫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신데, 성령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신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고 하지요. 성령의 가르치심!  아 그렇구나 그래 내 삶에 한 번 실행해 보자-이것이 성경 읽는 자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 때를 위한 그 때의 말씀이라고 본다면, 성경 속에서 메시지(영적 원리)를 찾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여서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경 공부를 하게 됩니다. 성경 구절을 다 외우고 있다고 해도 그 구절 구절의 의미를 깨닫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한 구절이라도 그 의미를 명백하게 깨달아 알고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이 이해함이 없이 성경통독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전의진목사

2014.10.13 17:51:40

10/10/14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4/1010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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