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55

금요기도회 :9/5/2014

대표기도:선교부  

찬송가:349장(새214장), 복음송:그 이름 비길데가 어디 있나

  1. 마5:4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μακάριοι οἱ πενθοῦντες, ὅτι αὐτοὶ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역설적인 진리이다. 웃음보다는 울음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50대는 자라날 때에 어른들로부터  남자는 씩씩하게 자라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자 아이가 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가 울면은 어른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사내놈이 그깐일로 울기는 왜 울어하면서 야단을 맞았지요. 눈물을 삼키고 울지 않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받았지요. 특히 경상도 쪽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서 어른이 되니 정서 장애가 일어나고 정신적인 질고를 앓게 되지요. 참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지요.  마음이 슬프고 아플 때는 마음 껏 울도록 그런 교육을 해야 하지요. 그래야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들을 키워 낼 수가 있지요

/웃음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울음입니다. 행복해 지기 위해는 울어야 합니다. 눈물의 효능? 몸상태가 좋아진다. 일본의 동방대학의 아리타 히데오 교수는 울려면 격렬하게 우는 편이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울고 싶을 때에 마음껏 우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왜? 우리는 붙들고 목 놓아 격렬하게 울 수 있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붙들고 울 수 있는 대상이 누구 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가 아닙니까? 예수 붙들고 울다 보면 하늘로부터 큰 위로가 우리 마음 속에 임하지요.

/호움즈라는 사람이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는 두개의 힘으로 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수레바퀴라고 보았는데, 수레 바퀴는 돕니다. 인생도 매일 같이 돌고 돕니다. 그렇게  인생의 수레바퀴를 돌아 가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 두개입니다. 하나는 웃음이고 다른 하나는 울음입니다. 웃음과 울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웃음과 울음은 정서(감정) 표현입니다. 정서와 감정이 일어나야 의지가 따라가지요. 적어도 웃음과 울음 중에서 하나가 없다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인생살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두개의 축이 바로 웃음과 울음입니다. 울음이 없고 웃음만 있으면 멋진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랍지역에는 사막이 많습니다. 아랍 속담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햇빛만 비추이는 곳은 사막이 된다. 비가 없고 햇빛만 비추이게 되면 땅은 황무지가 됩니다. 인생살이에도 그렇습니다. 눈물이 없고 웃음만 있으면 인생 살이도 텅텅비어 있고 황폐해지는 인생살이가 됩니다. 비가 와야 하고 쏟아 져야 합니다. 그래야 땅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열매가 맺히지요. 인생 살이에도 눈물을 펑펑흘려 보아야 인생의 참 맛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입니다.  또 한편으로 눈물만 한 평생 흘리면서 산다면 그것보다 더 고달픈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눈물과 웃음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인생이라는 직물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지요. 


*눈물의 색깔? 눈물에는 색깔이 있다. 어떤 색깔? 보통은 슬프고 아파서 눈물을 흘리지요. 사고를 만나서 뼈가 부러지고 몸이 깨어져서 울지요. 병 때문에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요. 보통 흘리는 눈물입니다. 또는 잘 나가던 사업에 실패해서 울기도 하고, 직장을 잃어서 울기도 하고, 마음을 두고 힘쓰던 일이 실패로 좌절과 절망 때문에 울기도 하지요.  이런 외면적인 아픔이 없는데도 마음이 쓸쓸하고 외롭고 우울하고 슬퍼져서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정서 장애로 말미암아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울기도 합니다. 전라도 사투리로 마음이 폭폭해서 울기도 합니다. 폭폭? 답답하다는 말이지요. 또 다른 차원의 눈물?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은 이해 못하는 눈물이지요. 너무나 기쁜 사건이 일어나서 기쁘다 못해 눈물을 흘리게 되지요. 아이들은 이 눈물을 이해 못하지요. 즐겁고 기쁜데 엄마는 왜 울어!  추운 겨울날 뜨거운 동태 찌개를 떠 먹으면서 어 시원해하지요. 아빠, 뜨거운데 뭐가 시원해라고 아이들이 말하지요. 그 시원한 것은 차겁다는 의미가 아닌데 아이들은 시원하다는 것을 차갑다가 이해하지요. 어른이 되면 알게 되는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뉘앙스의 차이를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애통일까요? 첫번째로 내가 울어야 하는 것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울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가 초래한 재앙과 고통 때문에 울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울 수 있어야 한다. 재앙의 결과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초래한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어야 한다. 간경화로 그리고 간암으로 죽어가면서 우는 환자-그리스도인은 간경화와 간암을 초래한 원인인 술에 취하여 살았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울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하여는 울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일으킨 원인인 죄에 대하여 울면서 통곡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통곡을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약4:9절<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왜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셨을까? 왜 갈보리산 올라 가셨을까? 빌라도? 산헤드린 공의회? 로마 병정들? 아니다. 너와 내가 지은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어떤 권사님 집의 며느리 왈 우리 시어미니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 아니다. 십자가가를 바라볼 때 마다 내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서 죽었다-대속사상(십자가 사상)! 이렇게 십자가가 보여지면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고전12:3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도들이 우리 주님에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신의 죄가 안 보이는 고로 스스로 의로운 자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께 성도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은 죄를 더욱 많이 보고 느끼게 됩니다. 주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감추어져 있던 죄는 드러나고 나는 죽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통곡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성도의 눈에 눈물이 마르고 있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내가 죄은 죄를 바라보고 울어 봅시다.  


*두번째의 애통? 두번째의 눈물? 우리의 이웃이 짓는 죄를 대신 걸머지고 우는 울음을 울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짓는 죄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내 이웃의 죄악이 강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내 이웃의 죄악은 내게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이웃 집에 불이 나면 내 집에도 그 불 재앙이 옮겨 붙는다. 교회가 진리에 서지 못하고 다투고 싸운다면 교회에 평강이 사라지고, 교회가 평안치 못하면 내 삶도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보고 느낀 한국 교회의 실상? 한국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타락하고 더럽혀지고 있다. 그의 자식들은 교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힘들고 지쳐있고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3달 동안 설교하러 교회에 가지 않았고, 피유석에 앉아서 함께 예배 드리면서 그 교회의 영성이 어떤지를 살폈습니다. 하나같이 교회의 영성은 바닥상태였습니다. 몸집이 큰 대형 교회 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까지도 모두 같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무척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느끼면서 우리의 신앙의 어머니인 한국교회가 영성을 회복하도록 이 보스톤에서 우리들은 울어야 합니다. 

/ 교회 밖에 살고 있는 불신자들이 짓는 죄악에 대하여도 우리는 울어야 한다. 불신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땅 위에서 그들의 삶을 마친 다음에는 지옥에서 영원한 세월을 살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사도바울의 눈물- 빌3:18절<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예레미야의 눈물-렘9:1절<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우리 주님 예수의 눈물-눅19:41절<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불신자들을 바라보면서 우는 울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부터 그런 마음을 부어 주셔야 되는 일입니다. 의인이어야 울 수가 있는 울음입니다. 이것이 주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때에 비로소 울 수가 있는 울음입니다. 인생들의 구원을 위한 울음. 이것은 큰 울음인데 이런 울음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을 때에 비로소 우는 울음입니다. 의인의 눈물! 

/사라져 가고 있는 사회정의-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나 민족이나 국가에 넘치는 죄악 때문에 울어야 한다. 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 사회에 임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멸망당하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도 고통을 똑같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 가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그 땅에 가서 잘 정착하여서 그 나라와 사회가 평안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했었지요.  이 사회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최후의 보루가 교회요 성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지 그 사회의 죄악이 넘쳐 났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죄가 관영하고 넘쳐나도 그 사회에 눈물로 기도하는 의인이 살아 있다면 하나님이 그 사회를 멸망 시키지 않는다. 그 의인 10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 사회의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 졸고 있다면…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 받아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군대의 속담!  느헤미야의 눈물-느1:3-4절<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 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공의 예언자-아모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암5:24절<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비가 내릴 때에는 우산을 폅니다. 우산이 크면 클수록 그 우산 속에 들어 오면 비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 정의가 무너져 있기에 하늘로부터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져 내립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우산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습니다.  그 우산이 다름이 아니라 성도의 눈물이며 기도입니다. 그 펼쳐진 우산 아래 들어온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세번째의 애통?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성도는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2천년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했지만 아직 완성은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것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셨지요. 이것은 예수의 생애의 고울이고 목적이고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완성될까? 예수의 재림! 예수의 초림 후에 2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확장되어 가고 있다.  Already-not yet!  D-day&V-day! 2차 세계 대전-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베를린 함락! 이런 시점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할일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우리에게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도요한의 기도. 계22:20절<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나?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슬픔의 날들이 마쳐지기 때문입니다.  골방에서 탄식하면서 통곡하면서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기도해 보았나요? 산 위에서 소나무 뿌리를 뽑으면서 부르짖었나요? 교회안에서 통곡하면서 기도해 보았나요?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통곡하면서 기도해 보고자 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주기도문에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두번째 청원! 시시 각각 고난이 몸에 엄습해 오는 그런 현장에서 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인가? 위로! 마태복음 산상 보훈에 기록되어 있는 위로라는 단어는 곁에라는 단어와 부르다는 단어로 구성된 단어이지요(파라칼레오).  울음을 울고 있는 성도 곁에 누군가가 와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이 단어가 요한 복음에는 보혜사로 사용이 되었지요.  세상 사람들도 실컷 울고나면 감정이 정화되어서 마음이 편안해 지지요. 성도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실컷 울면서 기도하고 나면 세상적인 평안과는 차원이 다른 성령 위로가 마음에 가득해 지지요. 성도의 행복-붙들고 목놓아 울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울 때에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 충만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울기 바랍니다. 요즈음 시대는 삭막한 시대인 것 같다-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다. 공감이 사라지고 없어져 간다. 자식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부모된 성도가 눈물을 흘릴 줄 모른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정치 지도자들 애국을 외쳐되지만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 애국이지요.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하여 냉담한 그들! 교회도 목회자도 성도도 눈물을 잃어 가고 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새 생명이 음터오고 눈물이 있는 곳에 소망이 싹튼다. 

/사회가 멸망 되어 가는데도 그 멸망 가운데서도 개별적으로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겔 9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분노를 쏟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중에서 행하는 가증스러운 일들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에 표를 그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하셨지요. 내가 이 땅의 죄악 때문에 울고 기도한다면,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사회가 멸망할 때에 죽지 않고 살 수가 있습니다. 



전의진목사

2014.09.10 16:41:54

09/05/14 금요 기도회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www.churchboston.org/sermon/2014/0905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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