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1. 45:4-8/요셉 이야기/50:19-20

/배경스토리:요셉이 형들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나이가 17살이었습니다. 애굽의 시위 대장인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총명한 사람이라 이내 주인인 보디발의 눈에 띄게 되어서 집의 집사(가정총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디발 부인의 모함으로 인하여서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그곳에서 만난 바로의 측근 인사인 굽는 관원장과 술관원장을 만나게 되지요. 거기서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되지요. 요셉의 해석대로 관원장은 복직되고 굽는 관원장은 처형을 당하지요. 

2년이 지난 후에 바로가 예지몽을 꾸었을 때에 애굽의 박사들이 꿈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의 번민이 깊어갈 무렵에 관원장이 감옥에 있는 요셉을 기억하고 천거하지요. 요셉의 나이가 때에 30이었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한 후에 일약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서 애굽을 다스리게 되지요. 7년간의 풍년에 애굽에 있는 동안에 요셉은 애굽 나라에 곡물을 저장하면서 다가올 7년간의 흉년을 대비했습니다. 이윽고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 안팎에서 기근 때문에 요셉에게로 사람들이 와서 곡물을 사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요셉의 10명의 형제들도 애굽에 왔고 요셉에게 곡물을 샀습니다. 10형제들은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요셉인 전혀 몰랐습니다. 요셉은 10명을 보자 마자 자기를 애굽에 팔아 넘긴 형제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요셉은 10명의 형제들 가운데 있어서 자기 동생 베냐민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안전하게 있는 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요셉은 10명의 형들의 마음을 여러 방법으로 찔러 보지요. 형들이 적어도 20 전과는 그들의 마음이 많이 바뀌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 후에 10명의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오늘 본문에서 드러내지요.

 

/오늘 본문 4절에는 요셉이 10명의 형들을 자기 가까이로 오라고 초청한 다음에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자신은 요셉이라고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통역를 세워서 이야기 했는데, 여기서부터는 히브리 방언으로 형들이 알아 들을 수가 있는 말로 이야기를 요셉이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요셉이라고 정체를 밝히면서 뒤에 무슨 말을 붙이고 있습니까? 당신들이 애굽에 자라! 말은 10명의 형들의 가슴을 철렁 거리면서 내려 앉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형들에게는 무슨 생각과 어떤 두려움이 일어날까요? 이제는 꼼짝 없이 죽었구나! 이런 형들의 마음을 요셉이 5절에는 형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형들에게 요셉이 이런 위로의 말을 있었겠습니까?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가 아니던가요? 17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버림을 당하였는데요. 요셉이 그래도 형제의 피부 치이니 정상적으로 우리 한국인의 정서대로 반응한다면 죽지 않을 정도로 두둘겨 다음에 용서해 주어야 하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달려 들어서 두둘겨 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아무런 조건 없이 그런 용서를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형제들보다 먼저 자신을  (애굽에)보냈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7 한번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후손에게 구원을 베푸시려고 당신들보다 나를 먼저 (애굽에)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요셉은 8절과 같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8 한번 같이 읽어 봅니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비록 당신들이 나에 대하여 시기 질투하면서 미워했기 때문에 내가 노예로 팔려서 애굽까지 왔지만, 하나님이 당신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22년이 지난 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고 후에는 사건 속에 있는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아픔과 괴로움의 긴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있게 되었지요. 이런 역사 이해가 나오니 무슨 행동이 나옵니까? 용서가 나옵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했던 형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할 있었습니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악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의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바라 보았다는 점이 위대하지요. 그러기에 이런 용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영적인 거인입니다!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현재에 당하고 있는 악들 속에서도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에 악이 가득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망하게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안위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나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을 우리는 지금도 잊지 않고 저주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에 과거에 일어 났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수가 있다면 요셉과 같은 용서를 나의 원수에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 만사를 본다면 요셉과 같이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본다면 죄인도 원수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하게 되면 영안이 열리기 되어서 세상을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보게 되지요. 우리는 상처라는 조그마한 틀로 세상을 바라보니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을 미워하지요. 만약 요셉이 자신의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를 가지고 형들을 대했더라면 형들이 무사했을까요? 

내게 상처를 사람들을 우리는 감정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미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내게 상처를 것에 대하여 그들을 의지적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즉각적으로 의지적으로 용서는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우리가 더욱 영적으로 자라난 다음에는 내게 해악을 끼친 사람을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영적으로 자라날 때까지 우리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 주십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요셉처럼 수가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자라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단에서 용서하라고 명령하니 말씀이 먹혀 들어가지 않지요.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 아이이기에 영적으로 자라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자라나면 용서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나의 원수를 불쌍히 여기면서 용서할 수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처를 통하여 예수를 만났고, 나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없었다면 그냥 세상 기쁨과 성공을 찾다가 지옥 텐데, 상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십시요. 나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사람이 나와 관계 없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가족이 내게 가장 상처를 있습니다. 또한 같은 교회의 성도들이 나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사람들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가 아프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을 치유하고 다음에는 그런 상처 없이 고이 고이 자라난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영적인 거인이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영적 거인이 되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야 겠습니다.

 

/다윗의 경우? 어떤 용서? 삼하16:5-14: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의 칼을 뽑았습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예루살렘 성에 있는 다윗을 죽이러  처들어 왔습니다. 다윗은 신복들과 허겁지겁 예루살렘 성을 떠났습니다.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 일행에게 돌을 던지면서 욕설을 퍼붓고 비방하면서 저주했습니다.. 다윗 곁에는 용사들 중의 용사들이 호종하고 있었습니다.  용사들이 다윗에게 건너가서 다윗에게 욕설을 퍼붓는 시므이의 목을 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의 용사들에게는 시므이는 주먹 거리도 되는 일입니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친족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2 왕이 때까지 사울 가문과 다윗 사이에는 오랜 동안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런 싸움을 하는 동안 왕권은 다윗에게로 넘어 갔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모두 블레셋 족속과 길보아산에서 전투할 때에 죽었습니다. 시므이는 사울이 왕권을 잃고 그의 가문이 몰락한 것은 바로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윗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의 일족 가운데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정 때문에 쫓겨 가는 것을 보면서 다윗의 일행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대적과 원수가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인데, 자기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쫓겨 가는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이런 상황인데 옆에서 시므이가 분노를 돋우고 있습니다. 보통 다른 같으면 시므이를 자리에서 죽여 버렸겠지요.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몸에서 아들도 나를 해하려 하는데, 사울의 일족인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냥 두어라. 하나님이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하면서 책임을 추궁할 있겠느냐? 이런 말을 하면서 다윗은12절에서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시므이를 죽여도 뭐라 사람이 없는데, 그에게 죄를 묻지 않고 덮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믿음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닙니까? 자신이 궁지에 몰려 있기에 궁지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는 다윗의 행동이 보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다윗의 절반만이라도 닮았다면 우리 나라 정치가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을 있겠지요.  자신이 궁지에 몰렸는데도, 자기를 욕하고 비방하는 주먹 거리도 되는 시므이를 처단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않았던가요? 시므이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은 시므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시므이를 처단 있겠는가? 그러면서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지 않았던가요?

 

/스데반의 경우! 어떤 용서? 자기를 돌로 들어 치는 원수들을 용서하면서 죽었다.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했던 말과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7:54-60.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은 59절에서 자신의 영혼을 예수께서 받아 달라는 간구를 했습니다. 60절에는 무릎을 꿇고서 크게 부르짖었습니다: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자신을 돌로 치고 있는 분노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용서의 기도가 있었기에 우리 주님이 사울을 바울로 바꾸어 있는 근거가 마련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기도를 받으신 후에 9장에 가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스데반이 죄를 지었는가? 지었습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는 이유는 예수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음 현장에서 보았던 환상이 5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성령께서 스데반의 영안을 열어서 보게 주었습니다. 죽으면서 예수님께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간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처럼 말입니까? 삼손처럼 말입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매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하늘 세계를 경험 사람들에게는 죄인도 원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스데반 집사처럼 우리의 영안이 시간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우리 주님이 7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중에서 번째의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요. 가상 7 중에 번째의 ! 용서의 말씀입니다. 23: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박혔습니다. 앞에 유대인들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고, 관리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 있는 능력도 권세도 있습니다. 또한 천사들에게 명하여서 자신을 구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권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대신 지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우리들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크게 느꼈습니다.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요? 십자가 너머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십자가 죽음을 죽은 후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 것을 보았고, 또한 자신의 부활로 인하여 죽은 많은 자기의 사람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실 것을 미리 내다 보셨기에 의연하게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낼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용서의 메시지를 보십시요. 무엇이라고요?  자기를 조롱하고 찌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용서를 주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저지레!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저들속에 우리들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용서의 청구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도 용서를 받을 있는 근거가 만들어졌습니다. 십자가 너머의 세계를 사람들은 우리 주님처럼 이렇게 넉넉한 마음이 됩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보여 달라고 간구합시다.

 

/ 삶에서 일어나는 좋은 , 나쁜 , 선한 , 악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가 있다면 내게 악을 행한 이들을 용서할 수가 있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당한 악들을 사용해서 선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 하나님께 부름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나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있게 됩니다. 그래야 내게 악을 행한 이들도 용서할 있습니다. 비록 원수들, 그들은 나를 파멸하려고 의도했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을 있었습니다. 원수들을 하나님은 선을 이루기 위한 agent 사용했을 뿐입니다.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에 내가 어찌 미워할 있겠는가?

/최수동-두다리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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