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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부활신앙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죽은 자가 역사의 종말이 되면 다시 살아 난다는 사상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부활이 인간 역사의 날에 일어날 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서가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12:2 말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땅의 티끌은 땅의 흙먼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때에 땅의 흙먼지에서부터 육신을 만드셨지요. 아담이 죽을 때에 그의 육신은 다시 흙먼지로 돌아 가게 되었지요. 바로 흙먼지에서부터 하나님이 다시 인생들을 살려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역사의 종말에 말입니다. 자는 자들이라는 말은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 문학에서는 죽음을 잠에 비유하지요. 죽은 자들이 역사의 마지막 날이 되면 모두 다시 살아 나는데, 종류의 살아 남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류는 영생을 얻는 무리들이 있고, 다른 부류는 영원한 수치를 받게 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개념으로 정리하면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들어갈 자로 나누어 진다는 말이지요. 구약의 이런 종말 사상을 신약은 계승했습니다.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들이 위에서 육신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다시 살아난 불멸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실현하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성경에는 육신을 입고 있지만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 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세계로 들어 가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죽음을 후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부활의 열매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불멸의 몸으로 역사의 마지막 날에 덧입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활 사상이 계시되기 2쳔년 전에 부활을 희미하게나 아브라함이 경험했지요.

성경 말씀에 의할 같으면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기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 경험하게 되었지요. 22장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드리는 기사가 적혀 있습니다.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재해석하면서 11장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11: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산의 제단에서 이삭을 결박하고 칼로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이 바로 자리에서 이삭을 다시 살려 내실 줄로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 일어났나요? 하나님이 약속의 아들로 이삭을 지목하고 주었기 때문에 이삭을 다시 살려 주실 밖에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아닙니까?

 

 

22:1-19/아케다(결박d~qo[}Y"w)!

1-2절을 읽겠습니다: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그랬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문제를 아브라함에게 내었습니까? 그의 아들, 독자인 이삭을 모리아 땅에 있는 어떤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청천벽력/마른 하늘에 벼락!

번제가 무슨 제사입니까? 레위기 1장에 보면 번제는 소나 양을 잡아서 각을 뜨고 그것을 불이 이글거리는 제단에 모두 홀라당 태워서 연기를 하나님께 올려 보내는 제사입니다. 연기, 고기 타는 냄새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든요. 번제는 소나 양을 바쳐서 전부 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헌신을 다짐할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위하여 소나 양으로 번제를 삼아서 제사 드리라는 말이 아니고 이삭을 제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잡으라는 말입니다. 이럴 경우라면 보통이라면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잘못 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시험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가 12절에 나와 있습니다:사자가 이르시되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아닌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오매불망 바라던 아들을 노년에 얻고 다음에 꿀단지에 빠져서 하나님 경외하던 믿음이 식은 것은 아닌지를 하나님이 시험해 보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상이 것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하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어 놓을 있을 없을 지를 말입니다. 보통 이정도 되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하나님이 내가 나이 되도록 살았으니, 이삭은 살리시고 나를 번제로 받으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번제로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번제로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있을 지도 모르는 우상을 깨뜨리고 싶어하지요.

아브라함의 불평과 원망이 마디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했지요.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에게 사실을 알렸습니까? 알렸습니다. ? 알렸더라면 사라가 반대했겠지요. 사라 때문에 일을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라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일은 시작도 되기 전에 좌초되었을 것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끌어 안고 아브라함에게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은 번제를 드리고 다음에 다시 하나님이 살려 내셔서 사라에게 데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즉각적인 순종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모리아 땅으로 떠났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종과 함께 말입니다. 브엘세바에서 3일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습니다. 침묵의 사흘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잡아 죽여야 하는 비장한 일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때에 말입니다. 일은 아브라함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알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아브라함만이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겠지만, 아비인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여야 하는 과정 속에서 고뇌를 겪어야 합니다. 이런 3일간의 침묵 속에는 가지의 상념이 오르겠지요. 정말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나면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살려 내실까 하는 의심에 의심들이 아브라함의 뇌리 속에서 피어 올랐겠지요. 그것은 상념일 말로 행동으로 표현되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3일간은 침묵의 기간이었습니다. 묵묵히 모리아 산을 향하여 걸을 뿐이었습니다.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리아 입구에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그만 따라 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을 명합니다. 오직 자신과 아들이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돌아 오겠노라고 말합니다: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 오리라!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가리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린 후에 하나님이 다시 자리에서 다시 살려 내시면 그런 이삭을 데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 오겠노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나타나 있는 구절입니다.

 

6-8/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사람이 동행하더니/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번제할 어린 > 대한 질문? 이삭의 질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어떤 대답을 합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이었습니다. 자기를 태워 장작 더미를 지고서 번제할 장소로 아비와 동행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우리 주님 예수를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았을 때에 자신을 불살라서 드리게 번제용 나무를 짊어 지고서 아브라함과 동행하는 이삭의 모습을 올렸습니다.

 

9-10/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하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 주신 곳은 어디? 모리아 땅에 있는 어떤 ! 모리아 땅은 어디일까요? 예루살렘입니다. 시온산이지요. 모리아 땅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중에 하나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이지요. 바로 거기가 년이 지난 후에 다윗이 번제를 드렸던 곳입니다.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없는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 때에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번제를 드렸지요. 번제로 온역이 그쳤지요.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이 어디라고요? 바로 우리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곳이지요. 골고다 언덕 말입니다.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장소가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이고, 그곳은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이고, 그곳은 골고다 갈보리 언덕입니다. 모두 같은 장소인데 이름이 달라져 있습니다. 모리아 땅은 주전 2천경에,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은 주전 1천년 경에, 골고다는 1세기에 계시가 되었지요. , 예루살렘은 그렇게도 중요한 땅입니다.

결박했다: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했다. 결박했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아카드라는 말을 쓰는데, 단어의 명사형은 아케다입니다. 그래서 22장의 기사를 히브리인들은 아케다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의 하는 행동은? 벌려 놓은 나무 위에 올려 놓고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Slaughter!

이삭의 반응?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들면서 반항했을까? 떼를 쓰면서 살려 달라고 울었을까? 아니면 감고 아비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순순히 받아 들였을까? 

이삭의 절대 순종! 어떻게 이런 순종이 나왔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절대 순종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이삭이 그의 아비 아브라함에게 절대 순종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불순종하는 아들과 딸을 분들은 자식들의 불순종에 한탄 일이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서 회개하고 순종한다면 자식들이 자신에게 순종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현시대의 부모님들의 탄식소리: 우리 아들이 아식의 반만큼만 닮았어도 다른 소원이 없겠다! 아이들이 말을 안들을까? 모유로 키우고 , 우유를 먹여 키워서 그런가? 소가 들이 받는 습성이 있잖아요.

 

11-12/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사자가 이르시되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이 동일시 된다.

아브라함을 번이나 불렀을까? 급했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시점이기 때문에 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기 위해서이다: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아노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arEy] 자라는 것을! 네가 독자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이제야hT;[" 안다. 네가 너의 아들을 잡아서 번제드리는 직전까지의 행동을 통하여 내가 알았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모리아산에서 아들을 나무에 벌려 놓고 잡으려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과정에서 말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아니야!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끼지 않았다/이것은 제자도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만을 사랑하고 헌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9:23, 10:37-39절에서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오늘 우리들의 삶도 이런 제자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우상이 없어야 한다. 지금은 우상을 부수고 불태워 버려야 때이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다.  믿는 자는 많은데, 제자는 드물다. 우상은 우리 심령 속에 있는 예수의 형상을 흐리게 만든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20:5

               *우상을 멀리하라/요일5:21

               *우상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 14:8

               *다만 예수, 항상 예수, 오직 예수! 죽으면 죽으리라. 아멘-중국 조선족의 기도

 

13-14/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아브라함이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삭을 대신하여서 수풀에 걸려 있는 수양을 번제로 드렸다. 처음으로 구약 성경에 대속 사상 나타나 있다. 십자가는 대속.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희생했다. 8:32---à오늘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미 수양을 준비해 놓았다. 7-8절에서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은 어린 양을 끌고 가거나 안고 가는데, 아브라함이 어린 양을 데리고 가지 않기 때문에 이삭이 물었지요.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친히 수양을 준비해서 이삭 대신에 번제로 드릴 것을 알았나요? 아니지요! 그랬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번제로 드리는 것은 싱거운 연극이었겠지요.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수양을 이삭 대신에 번제로 드릴 것을 결코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에 대하여 물을 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이 일종의 예언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어디에서 준비되는가? 여호와의 !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여호와 이래! 수양이 이삭을 대신하여서 번제로 드려졌다. 대신하여서! 그래서 이름을 무엇이라고요? 여호와 이래! 의미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의미라고 덧붙여 해설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우리들의 삶에 가져다 주는 유익은?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보신다. 본다가 중심 뜻인데, 준비하다, 예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공급하신다! 여호와 이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적용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예배하러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결핍,그들의 부족함, 그들의 필요를 보시고 그들의 결핍을 공급하고 채워주신다는 의미입니다. 11:6절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34:9-10

*7:11

*16:1-4


섬김이1

2018.09.17 11:52:45

2018년 9월 14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914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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