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2001년 4월 13일 금요일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려 죽으신 날이다.
  미워함의 죄 카인의 죄에서, 패역의 죄 광야 이스라엘의
죄, 교만의 죄 지식 유태인의 죄까지 나는 모든 죄를
지었다. 그 중에서도 교만의 죄는 인간이 짓는 마지막의
죄이자 가장 크고 무거운 죄이다. 나는 낮아져야 한다.
물이 되어야 한다. 강물보다도, 시냇물보다도 아래에 있는
바다가 되어야 한다.
  새벽기도에서 나는 어쩐지 교만함에 대해 회개의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도 자리에 앉아서가
아니라 꿇어앉아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만함을, 교만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었다. 교회당의 바닥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시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려 빌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는
교만한 놈입니다. 교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을 무시했습니다. 4년전에 그 엄청난 성령체험을
하고서 지금까지 성령님과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을
모욕하고 침뱉고 얼굴을 치며 발로 찼습니다. 성령님을
의심하고 사도들도 무시했습니다. 제가 아주 대단한
사람인양, 하나님보다도 예수님보다도 성령님보다도
사도들보다도 더 나은 사람인양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고 교만한 놈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을 모욕한
자들처럼 그렇게 제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하나님,
성령님을 모욕했습니다.......제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령님이 몸 안에서 강력히
움직인다.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그 때처럼, 미국에서
북한동포를 위해 기도하던 그 때처럼, 몸은 결박되듯
꼼짝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혀는 휘말려 소리가
나온다.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엘리, .......”

  온 몸이 저절로 뒤틀린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무릎을 땅에 찍는다. 끊어질 듯한 허리 부분의
고통은 계속되고 드러눕고 싶어도, 쓰러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엎어지지도, 드러눕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입에서는 ‘엘리’라는 말이 끊임없이 터져 나와 예배당에
울려 퍼진다.
  성령의 불세례 이후 오늘같이 뜻이 있는 낱말로 된
방언(히브리어)은 처음이 아닌가. 오! 내 속에 있는 성령,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20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내 혀를 통해
반복하고 계시구나!

  새벽기도를 마치고 사무실에 출근해 컴퓨터에 앉아
‘엘리’(나의 하나님)라는 말의 의미를 더 분명히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본다. 우연히 나의 생각에 꼭 맞는
시를 하나 발견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가복음 15장 33-34절, 누가복음 23장 34,46절



지금 이 시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긴긴 밤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갖은 멸시를 다 당하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를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에 달려서
가시관을 쓴 채
고개를 떨구시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이렇게 외치실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리고 큰소리를 지르시고
세상을 떠나실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께서 죽음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부르짖음이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게 합니다.
왜 이 절박한 순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아버지라는 친근한 말 대신에
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
인간이신 예수께서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는 이 순간에
아버지,
얼마나 부르고 싶은 이름인가.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외치셨다면
더 감동적이었을텐데.
왜 예수께서는 아버지 대신
나의 하나님이라는
거리감이 있는
칭호를 사용하셨을까?
그 까닭이 대체 무엇일까?

1. 십자가의 사건이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류와의 문제였습니다.
전 인류의 생전과 구원에 관계된 문제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들에게 이끌려서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으리만치
인간의 죄악이 심각함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이 죄악과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온 인류와 온 세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듯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주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건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생명이 끊어지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음으로써
십자가의 사건을 전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구원의 사건으로 만드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우리를 위해서
범죄한 인간들을 위해서,
고통 당하시는 순간에 터져 나오려는
아버지라는 말을 절제하시는 예수의 극진하신 사랑.
그 사랑의 눈으로
지금 예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2. 결정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자신을 구원해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도움을 바라지 않는 절규입니다.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제발 나를 구해주십시오.
아버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아버지, 조금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는 없습니까?
왜 이렇게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절제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을
꼭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시기 위해서
아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언제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그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의 고통을 덜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
아버지를 부릅니다.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제발 용서해달라고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이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때를 위해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그토록 아끼신 예수님.
이 절제된 언어의 사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궁하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이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이름을 지워버리시옵소서.
차라리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매무지한 백성들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신명기 32장 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가슴이 터져라 부르고 싶으신 그 이름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 이름 대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3.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능력의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하나님.
해를 중천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예수께서 부르는 하나님은
이렇듯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환난에 처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탄원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을 구원하시고
범죄한 인간을 응징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아들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는 침묵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없습니다.
모세가 손을 내밀었더니
바다가 나뉘었는데.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렸는데.
베드로와 사도들이 기도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성자께서 절규하시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성자의 절규와
성부의 침묵하심.
성부의 침묵하심으로 인해서
예수의 버림받으심이 극명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이 죽음의 순간에 완전히 버리신 하나님.

그런데
능력의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은
즉각적인 구원과 심판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겠지만,
애굽 사람들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축복이지만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심판의 연기입니다.
그 아들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즉각적인 응징을 유보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시고
회개한 자들에게는 선교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울부짖음과
그들이 죽어가면서 내짖는 절규를 들으시면서도
그들에게 침묵하시고
그들을 죽이는 자들을 응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
직접 응징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하심의 깊은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지
이천년이 지났건만
이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고 있습니다.
그 인간들의 행태를 길이 참아주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절제된 언어의 사용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인내하심을
다시금 체험하고 감격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사랑하시고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인내하시나이까?
아버지여
바라옵건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하심에
항상 감격하여 살게 하시고
이 사랑을 저 우매무지한 자들에게 전하게 하시어
그들도 구원받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종록, 인터넽 설교, 1991년>


2001년 4월 17일 화요일

  15일 부활절 아침에 3일간의 금식기도를 끝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금식을 하고 주말 하루
동안은 금식기도원에 있었다. 부활절 내내 잠을 자고
휴식을 취했다. 어제도, 오늘도 일가친지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한다. 내가 하나님,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일가친척, 친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01년 4월 29일 일요일

  성령에 이끌려 새벽기도를 갔다. 함께 읽은 성경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리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1-10)

  저녁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다시 한번 성경을
뒤져보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계속
궁금했고 그것을 알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과 내가 그토록 따르려고 한 ‘하나님의
뜻’의 해답을 발견했다. 요한복음 6장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26-40)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기도였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일은
‘아들을 믿게 하는 것’,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 ‘영원한 생명의 떡을 먹게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나는 심령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세
번 들었다.
  첫 번째는 미국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켐브리지연합교회에서 일요예배 중에 들은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 믿어라’고 질책하는 말씀이었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과천교회에서
북한동포를 위해 새벽기도를 할 때 “천일을 기도하고
만일을 준비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하여 네 민족을
구원하리라”는 민족구원의 말씀이었다.
  세 번째는 지난 2월, 집 근처의 충신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직접 주신 이 세 번의 말씀과 오늘
성령으로 가슴에 와 닿은 출애굽기 3장과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모두 합하면 무엇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구체적인 일이다.
  7천만 우리민족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 우리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에 내가 하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에 선봉이 되어야 한다. 나는 부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이고 전문적으로 예수님 그
생명의 떡을 먹게 해야 한다.


2001년 5월 2일 수요일

  김진홍 목사님의 4월 15일자 ‘사망에서 생명으로’라는
설교를 인터넽에서 보았다. 참으로 은혜로우신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받지 않고 천국에 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천국행 여부가 결정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부활신앙을 굳건히 할 때 우리는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곧 축복이다’는
요지의 말씀이다.


2001년 5월 3일 목요일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누구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경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에서는 세세토록 왕으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태초의 우리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세기 1장)
  오늘의 우리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미래의 우리 : “이는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요한계시록
22장)
    

2001년 8월 20일 월요일

  5월이 되자 내 마음은 들볶이는 깨처럼 안절부절했다.
「이제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정이를 낳게
해주신다고 확신을 준 그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정이는 아무 차도가 없다. 육체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이 봄이
가기 전에 정이를 낫게 하신다고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정이가 5월말까지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정이가 낫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신앙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
  정이가 나을 때까지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금식기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노 장관이 맡긴 프로젝트
때문에 연구소를 비울 수 없다. 금식기도를 하러 떠날
수가 없다. 나의 기도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다.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5월 중순이 지나면서 나의 조급함은 더욱 심해졌다.
전에 나를 보지 않고 나에 대해 말한 조 집사님을
찾아갔다. 조 집사는 나를 보자마자 자기가 나를 만나기
직전에 겪었던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이 낫지 않을까
안절부절했던 이야기. 그리고 환자를 만나 기도하고
좋아진 것을 보고서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자
예수님이 꾸중하신 이야기 등등. 나의 마음과 꼭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신앙체험과 정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향후의 내
삶에 대해 상담을 한다. 신학대학원에 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여쭈어 본다. 조 집사님의 방언으로 몇 가지의
방향이 제시된다. “정이에 대해서는 네가 할 일은
다했으니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말라. 너는 신앙이 약하니
지금의 생업에 전념하라. 그리고 신학대학원에 가려면
너를 다 버려야 하는데 지금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만일 간다면 2-3년 후가 될 것이다.”
  나는 조 집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신학대학원에 가는
것을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봄이 가기
전에 정이의 병이 낫는다면 더 이상 좌고우면할 것 없이
전력을 다해 성경공부에 몰두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
집사의 말을 듣었고, 5월말이 되어도 정이에게 차도가
없었다. 다만 “마음으로는 다 나았다”는 정이의 말만을
들었다. 6월이 되자 나에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시
신앙의 무력증이 밀려왔다. 다시 방황이 시작되었다.
기도도, 성경공부도 모두 나의 생활에서 멀어져 간다.

  6월 13일 이수인 선생의 1주기를 마치고, 6월말
세종리더십개발원의 존폐문제가 다시 압박으로 밀려온다.
지난 10년간의 온갖 꿈과 열정이 녹아져 만들어진 세종을
계속할 것인지 문을 닫을 것인지 결단하라고 동료들이
재촉한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소주를 연신
들이키면서 세종을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노 장관의 연구소에서 활동비가 들어오지 않는다.
경제적 부담을 최소로 하기 위해 10년 간 갖고 있었던
집을 7월 초에 팔았다. 전세를 구하지 못하고 월세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팔자마자 집을 판 나의 결정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마음은 돌이키고 싶었으나
계약을 돌이킬 수 없다. 집을 팖으로서 경제적 도움은커녕
큰 손실만 생겼다. 집값은 급등하고 금리는 급락한다.
  7월 내내 집 문제로 집사람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갑자기 경제적 무력감이 해일(海溢)처럼 밀려온다. 자신이
없다. 삶에 자신이 없다. 헛된 인생이다. 지난 20년간의
꿈도, 운동도, 정치도, 공부도 모두 헛되다. 모든 것에
자신이 없다. 리더십도, 강의도 이제 자신이 없다. ‘내
인생, 내 가족 하나에 대해서도 리더십이 없는 놈이 무슨
리더십개발이냐’는 생각이 든다. 세종이 나의 가슴에서
멀어져 간다. 민족도, 통일도, 정치도 모두 멀어져 간다.
나이 마흔이 되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샐러리맨을 부러워한다.

  7월이 되고 8월이 되어 온통 경제문제에 정신이 팔린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것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나? 작년 6월 국회를 그만두자마자 부닥쳤던 경제문제가
올해는 더욱 증폭되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한 친구가 보험영업을 하자고 권한다. 나는 신앙초기에
목사 빼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켜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 것처럼, 딴 일은 몰라도 보험영업을 하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있다면
보험영업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강권으로
보험영업소에 가서 교육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보험영업은 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년 간 품어온 꿈과
살아온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하고 있는 노 장관의
일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옳은 일이다. 제갈량은 안될
줄을 알면서도 유비와 함께 하지 않았는가? 대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노 장관과 정치를 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정치적 활동이다. 노 장관이 당선 안 되면 신학대학원에
간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보험을 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물리친다.

  또 다른 친구는 “너의 가치는 정치든, 종교든 공적인
일을 하는 것이니 고고하게 살아라. 돈은 내가 벌어
줄께”라고 말한다. 나는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그
친구에게 참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지음(知音)이다. 다시
내 자신에 대해 희망을 갖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선배의 도움이라는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경제적 절망으로
인해 우리 부부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하셨고, 노
장관의 일을 계속하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려주셨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언제쯤 이 방황의 인생을 끝내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언제 이 ‘바벨탑의 벌’을 멈추실 것인가!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정이를 낫게 해주시지
않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정이가 나으면 바로
신학대학원에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데......
정이가 치유된다는 분명한 메시지와 체험을 주셨으면서 왜
그 일을 이루시지 않는 걸까? 기도가 부족해서인가? 내가
아직 겸손하지 않아서, 목이 곧아서인가?

  무기(武器)는 자유의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예리한 칼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기관총과
미사일이 스스로 아무렇게나 발사된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큰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무기’가 되기를 바라신다.
자유의지가 없는 무기, 사용자∙주인∙소유자의
의지에 의해서만 작동될 수 있는 무기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야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 가장 부합하는 글을 읽었다. 오늘
밤 우연히 집어든, 윤 선배가 5년 전 세례기념으로 선물한
Glyn Evans의 『Daily with the King』의 8월 20일자 글을
읽으며 나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묵상한다.

           August 20 :  Accomplishing in the Spirit's
Power

  The second area in patterning my life after Jesus
Christ is in my relationship to the Holy Spirit. What
was Christ's relationship to the Spirit? Again, one of
utter dependence. Nowhere do we read that Jesus
performed any miracles or uttered marvelous teachings
before His baptism and filling by the Spirit. But at
His baptism, at about thirty years of age, God filled
Him with His Spirit "without measure"(John 3:34). From
that point on Jesus was a dynamo of power, healing,
teaching, and snatching people from death and from
demon possession. Even His ability to die for us on
Calvary was accomplished through the Holy
Spirit.(Hebrews 9:14)
  That simple dependence upon the Holy Spirit was
necessary on Jesus' part for the accomplishing of
God's will through Him. It is also necessary on my
part if I am to accomplish God's will through me. God
does not build His work on my personality, gifts, or
abilities; He builds it on the Holy Spirit in me, with
or without my abilities.
  The world calls Jesus Christ a "religious genius",
which is nonsense. Jesus Christ, the Son of God, chose
to let the Holy Spirit work completely through Him,
and the "genius" aspect of Christ's life is simply the
Holy Spirit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through the
obedient Son.
  Victorious Christian living is not my "fulfilling
myself" rather, it is letting the Holy Spirit fulfill
Himself in me. If Jesus Christ, the perfect Son of
God, felt it necessary to surrender completely to the
Holy Spirit, then certainly I, ingrained as I am by
sin, must feel the same way.
  But, thank God, it is possible! Being Spirit filled
is not a privilege of the Son that cannot be shared.
"Be filled with the Spirit"(Ephesians 5:18) is my
privilege too!
  "The Spirit of the Lord God is upon me, because the
Lord has anointed me to bring good news to the
afflicted; He has sent me to bind up the
brokenhearted, to proclaim liberty to captives, and
freedom to prisoners."(Isaiah 61:1)  


2001년 8월 21일 화요일

  성경통독 테잎으로 버스 안에서 신명기를 들었다.
신명기 8장이 가슴에 다가온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2001년 9월 20일 목요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이다.”
- 블라디미르 푸틴 -

  많은 번민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이 말이 참으로 큰 은혜가 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나의
어리석음과 약함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삼으셨고, 당신의 뜻대로 내 삶을 이끌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나의 고민과 고통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번민과 방황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지난
봄,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고 참으로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신 것,
그래서 나를 더욱 더 큰 혼란과 고민 속으로 몰아넣으신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것이 혼돈이든, 번민이든,
고통이든, 나아가 죽음일지라도 좋은 것이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이다.
회초리든, 벌이든 모두 좋은 것이다. 더구나 그 아버지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참으로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
  구약전체를 통해 나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선하신
지를 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제외한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산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 조그마한
불의와 부정도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 담배를 한 모금만
빨아도 속이 뒤틀리는 것처럼 속이 뒤집어지는 그런
고통이 없이는 불의와 부정을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옳지 않는 것, 좋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실 리가 없다. 나쁜 길로 나를 이끄실 리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사랑 많으심을
손뼉치며 찬양하자!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뛸 듯이
기뻐하자!


2001년 9월 22일 토요일

  또 구약을 끝으로 성경전체를 다 들었다.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구약을 다 들은 것은 이제 세 번째이다.
그러나 나에게 구약은 고역이다. 고통이다. 나는 구약을
통독할 때마다 절망한다. 인간에 절망하고, 또 하나님께
절망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죄악과 한눈만 팔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그 단절에 절망한다. 인간의 이 죄악과 패역을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께도 절망한다. 책망과 끌려감,
몰살과 초토화라는 벌을 통해서도 인간과 행복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시는 하나님께 절망한다. 구약은 절망이다.
구약은 천길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자살직전의
아버지와 아들같이 절망이다.

  이 참담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과연 어떻게 오는가. 이 구약의
절망(絶望) 속에서 나는 신약을 대망(大望)한다. 왜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는지, 왜 예수님이 희망인지,
왜 예수님이 구세주인지, 왜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가슴 절절히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인류 전체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절멸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이것이 희망이다, 인간에게는. 예수님이 희망이다,
하나님께도.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도 커지는가. 절망의 어둠이
짙을수록 희망의 등불을 더욱 사모하는가!


2001년 9월 25일 화요일

  하나님을 믿은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감사헌금을 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미국의 캠브리지연합교회에 감사헌금을
보냈다. 생활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을 때, 생활에
자신이 넘쳤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았는데....
고민과 고통 속에서 나의 처지를 세심하게 돌보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를 드린다.


2001년 11월 1일 목요일

  차안에서 테입으로 듣는 찬송가 중에서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이라는 곡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이 날 구해 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2001년 12월 19일 수요일

  “내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 과연 나를 사랑하실까? 내가 아이들에 대해
한없이 사랑을 느끼고, 잘 해주고 싶고, 내 힘이 비록
부족해도 아이들에게 뭔가를 도와주고 싶은 이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실까?”
  나는 지난 봄 이후로, 마음 속으로 어린아이처럼 이
질문을 계속 던진다. 이때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난
2월에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악한 너희 인간들도
자식을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  
  “사랑하는 아들아,.....” 이 얼마나 사랑스런
목소리인가! 이 얼마나 기쁘고 든든하고 행복한 말씀인가!
참으로 부드럽고 온유하게 사랑을 담아서 나를 부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내가 나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나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아버지. 퇴근길 버스
속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5년 전 미국에서 느꼈던 성령
충만함의 기쁨,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그 행복감을
다시 느낀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 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 듯 하도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 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 주의 자비롭고 화평한 얼굴 모든
천사도 반기며 주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천지가
화답하도다.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 행복을
하나님 외에 과연 누가 줄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누가 천국을 싫다고 하는가?
하나님을 모르고 천국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우리가
아는 이 세상 외에 참으로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을 최고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참으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요즘 나는 호기심 가득하게 나의 앞날을 기다린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계실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fp인다.
2002년 1월 5일 토요일

  이 세상의 참된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의 참된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간 존엄성의
근원은 어디인가? 지난 몇 개월 간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난 40년 간 살아온 인생의 여러 경험을 뒤돌아 봐도
하나님 이상으로 인간을 더 가치롭게 만드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과연 그 자체로 지고(至高)의 가치를 갖는가? 하나님이
없는 나는 과연 그 자체로 가치있고, 나는 내 가족과 친구
하나 하나를 과연 지고의 가치있는 존재로 대할 수
있는가? 나에게 주위 사람들의 가치를 높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역시 나는 죄인이다.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가치를 한치도 높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하는 일이라곤 나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치조차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라,
나는 죄인이로다. 나는 악인이로다. 죄인이 하는 일은
일마다 더욱 죄를 짓는 것이고 악인이 하는 행동은 그
하나 하나가 더욱 악취나는 것일 뿐이다. “악한 너희
인간들도”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역시 옳다.

  나의 리더십프로그램에 따르면 ‘가치’가 모든
관계발전의 첫걸음이고, 리더십과 팔로십에 있어서도 첫
단계이다. 가치를 인정한 만큼 관계가 깊어지고 가치를
인정하는 만큼 리더십과 팔로십이 발휘된다. 상대의
가치를 인정해야 올바로 상대를 사랑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다. 가치를 얼마만큼 높이 부여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강도도 달라진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인간의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인간, 그 자체의 가치는 과연 어디서 나오는가? 아무리
둘러보고 생각을 해도 하나님 외에는 없다.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나를 참으로 가치있게 만들지 못하고 나도 다른
사람을 참으로 가치있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이 나에게 진정한 가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훼손된다. 지고(至高)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결국
관계가 타락한다.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나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2002년 1월 9일 수요일

  지난 해 2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맞은 그 봄처럼
요즘도 자꾸 자꾸 설교로, 성경으로, 찬송가로 마음이
간다. 집에 돌아오면 인터넷에서 김진홍, 이갈렙 목사의
설교를 매일 듣는다. 도쿄에 있는 선배에게 나의 마음을
이메일로 보낸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올해로 40년이 됩니다만 지난
1년 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결과 올해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오는 4월 20일에 있는
민주당후보경선 결과 내가 할 일을 없어질 경우 저는
신학대학원에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간
여러 가지 인생경험과 많은 고민을 했지만 하나님의
일처럼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리더십도 하고, 통일건국도 하고, 세상에 좋은 일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자꾸 자꾸 듭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 제 인생을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2002년 1월 12일 토요일

  김진홍 목사의 솔로몬에 대한 설교, 솔로몬의 1천
번제(燔祭). 이것과 내가 귀국한 뒤 과천교회에서 새벽
기도할 때 들은 하나님의 말씀, “천일을 기도하고 만일을
준비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하여 네 민족을
구원하리라”라는 말씀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1천번제와
천일기도..... 솔로몬은 1천 번제를 통해 국가를 다스리는
지혜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아직 1천일기도를 드리지
못했다. 아직도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유효하다.


2002년 1월 13일 일요일

  요한 웨슬리에 대한 생각을 몇 달만에 다시 한다.
김진홍 목사께서 설교 중에 하신 말씀, ‘혁명을 거친
프랑스와 개혁으로 사회발전을 이룬 영국의 가장 큰
차이는 요한 웨슬리와 같은 사람의 유무에 있었다’는
말씀이 가슴에 다가온다. 그 이후로 요한 웨슬리를 계속
생각한다. gamly.net에서 요한 웨슬리에 대한 글을
읽는다.
  요한 웨슬리는 35살 때 Aldersgate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것이 그의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의 교회와 비교하여 성령의 체험과
역사(役事)를 강조하고 사랑을 강조하며 사회개혁에 큰
힘을 기울인 웨슬리의 기독론이 나의 마음과 유사하다.
  그런데 웨슬리가 회심한 장소가 Aldersgate가 아닌가.
가만 생각하니 5년전 내가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곳이
또한 Aldersgate가 아닌가. 지금 생각하니 나도 요한
웨슬리처럼 우리 나이로 35살에 Aldersgate라는 이름의
수련장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났지 않은가.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웨슬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I began to pray with all my might for those who had
in a more especial manner despitefully used me and
persecuted me.  I then testified openly to all there
what I now first felt in my heart.  But it was not
long before the enemy suggested, ꡒThis cannot
be faith; for where is thy joy?ꡓThen was I
taught that peace and victory over sin are essential
to faith in the Captain of our salvation; but that, as
to the transports of joy that usually attend the
beginning of it, especially in those who have mourned
deeply, God sometimes giveth, sometimes withholdeth,
them according to the counsels of His own will.
  After my return home, I was much buffeted with
temptations, but I cried out, and they fled away.
They returned again and again.  I as often lifted up
my eyes, and He “sent me help from his holy
place.ꡓAnd herein I found the difference
between this and my former state chiefly consisted.  I
was striving, yea, fighting with all my might under
the law, as well as under grace.  But then I was
sometimes, if not often, conquered; now, I was always
conqueror.“(Wednesday, May 24. 1738)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대해, 어떤 경우에 그 만남이
가능한가에 대해 2년 전부터 계속 생각해왔다. 그 만남의
과정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일방향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방향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역사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믿음은 만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 사랑도 만남에서 나온다.
나아가 소망은 어디서 나오는가. 소망도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나온다.
  하나님과 인간은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믿을 수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만남에서 모든 것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아무렇게나 만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죄악이다.
죄악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 외에 보통의 인간은
만날 수 없다. 그 대표적 예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만날 때이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 아론 외에는 그 누구도 산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제사장과 백성들은 옷을 빨아 입고 몸을 성결케
한 뒤에도 당신이 계신 시내산의 근처 밖에 올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하나님은 더러운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신 모양이다. 아예 눈을
돌려버리신다. 더러운 것이 가까이 오면 출애굽기
19장에서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계신 것처럼 죽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아직 이것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구약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가?
만날 수 있는가? 스스로 나가는 방법은 자신의 죄에 대해
피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통로이다. 예수님의 피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로를 꽉 막고 있는 오물(죄악)을 없애는
세척제와 같다. 하나님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인간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 깨끗하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깨끗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아!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산 위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라고
설파하셨나 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다른 사람의
기도이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당신이
결코 볼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눈길을 돌리신다. 백부장의 종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 의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귀와 눈과 손을 움직이는 영향력이 발휘된다. 그러나
기도는 오직 사랑으로 가능하다. 사랑이 없으면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이 먼저
관심을 가지시고 얼굴을 마주하시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를 만난 주체는
하나님이다.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먼저
구원의 손길을 내린 분도 하나님이다.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을 주도한 것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있었다.

  나와 하나님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물론 나는
마음이 가난해져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항복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어떻게
가난하게 되었는가? 나도 모르게, 나의 의지와 상황과는
관계없이 그런 상태가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미국의
‘그레이스 채플’에서 성만찬을 따라 할 때인 것 같다.
그때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생각하며 가슴이 뜨거워졌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맞이했다. 그 날, 예수님을 만날 때
내가 깨끗했는가? 나는 깨끗하지 못했다. 내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께 나의 죄를 회개했는가? 그 때는
회개하기 이전의 상태였다. 회개는 그 열흘 후에 했고
회개를 하면서 불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우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먼저 보셨다. 그리고
구주를 갈망해온 나다나엘은 빌립의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면서도 예수께로 나아갔다. 그 다음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꿰뚫어 보시고 그의 가치를 인정하셨고
나다나엘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 그
이후 비로소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인격적 교제가
시작되었다.


2002년 1월 17일 목요일

  나는 또 나의 한계를 절실히 느낀다. 과연 나는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고 악하고
교만한가. 나는 얼마나 무능한가. 그러면서도 회의한다.
과연 따라가면 되는가.  


2002년 1월 19일 토요일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준비하시는 하나님. 나의 앞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이레의 여호와, 그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감격했을까!
  여호와 닛시.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승리의 깃발 하나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투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 닛시의 여호와, 그 때
모세는 얼마나 든든했을까!


2002년 1월 24일 목요일

  이갈렙 목사님의 설교를 이틀 연속 들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다. 이갈렙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성경의 그 풍부함과 깊이와 오묘함을 절실히 느낀다. 지난
12월 31일에 행한 ‘서원’(誓願)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으며 내가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되새겨 본다.
  하나님을 믿고 난 뒤 나는 큰 서원을 했다. 성령의
불세레를 받자마자 죽음에서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몸과 마음, 뜻과 정성을 다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다. 이 서원을 나는 그 이후에도 여러 번
했다. 나는 이 서원을 다 갚아야 한다. 이 서원을 갚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다
갚겠나이다.”  
  지난 12월 23일 성탄절을 맞아 김진홍 목사님이
‘성탄(聖誕)과 성탄(成炭)’이라는 설교를 하셨다.
여기서 김 목사님은 우리가 숯, 참숯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계속 숯을 생각한다. 공기를
차단한 가마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태우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연기가 나지 않는, 세상에 참으로 유익한 숯이
되는 그 과정을 생각한다. 성령의 불길로 ‘겉 사람’은
다 태우고 ‘속 사람’만 남긴다. 속 사람이 활동할 때 겉
사람의 연기가 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참숯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몸과 마음, 뜻과 정성을 다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번제(燔祭)이다. 구약의 번제는 남김없이,
모두를 태워 하늘로 날려보냈다. 신약의 번제는 자신을
참숯으로 만드는 것이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숯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참숯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이다.


2002년 1월 26일 토요일

  김진홍 목사의 소개로 어제 ‘로렌조의 오일’이라는
비디오를 보았다. 비록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 해도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이 하나의 생명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생명 하나를 구원하는 것이 이 세상 전체를
얻는 것 보다 낫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가슴으로
울려온다. 생명 하나를 이 세상 전체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고, 그 생명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집요하게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동안 너무 큰 것, 너무 많은 것만
구하려고 생각했다. 너무 쉽고 너무 편하게 그것을 얻으려
했다.
  이갈렙 목사가 행한 「죽이는 자는 살리는 자를 못
이긴다」(93.3.21)는 설교를 오늘 읽었다. 출애굽기 1장
15절에서 2장 10절에 걸친 모세의 탄생과 구원에 이르는
대목이다. 이 설교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통념을
깨고 아주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불치병에 걸린 로렌조
하나를 구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부모에 의해
‘로렌조 오일’이라는 약이 만들어지고, 이 약으로 ALD에
걸린 수많은 생명이 구원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왕
바로의 명령에 의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불치병에 걸린
것과 같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모세 어머니는 집요하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로렌조의 부모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내린 것처럼 모세의 어머니에게도 하나님이 은총을 내려
그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와 관계된 족속 모두를
살리게 하셨다. 로렌조와 같은 병에 걸린 ALD 환자들,
모세의 족속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다.
  이갈렙 목사는 다음 말씀은 참으로 은혜롭다. 하나의
생명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려고 할 때, 끝까지 생명을
붙들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법대로 사는 착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자라도 살려주는 자를 요구하는 것이고,
죽을 자라도 살리려고 할 때에는 지혜를 주신다
그것입니다. ......남을 살리다가 죽을지언정 나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일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없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이갈렙,  93.3.21)


2002년 1월 27일 일요일

「너희가 나를 위해서 살았느냐? 아니면 너희를 위해
나를 사용했느냐?」

「"너희가 병 나음도 받을 수 있고, 부요도 할 수 있고,
평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너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믿겠느냐? 불의한 재판관이 그 과부의 원한을
따라 시끄러워서 귀찮아서 도와주듯 하듯 나도 그런
경우도 많으니라. 많은 사람이 능력을 힘입었다고 하나
마지막에 천국에서 바라는 찾아내려는 믿음을 보겠느냐?
저희는 나를 위해서 살았느냐? 저를 위해서 나를
사용했느냐?" 천국에서는 주를 위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주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나라이지,
하나님 나라에서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이갈렙, 94.7.10)
  ‘자기를 고친 사람을 예수라 하여’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5장의 내용을 설교하신 이갈렙 목사의 말씀이
나를 또 부끄럽게 한다.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위해 살려고 하느냐? 너를 위해 나를
사용하려고 하느냐?”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틈만 나면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려 하고, 내 뜻을
위해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려는 이 간사와 불충을
용서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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