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에 가지신 잣대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잣대를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어떤 행위입니까? 선한 행위인데, 모두 6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6가지 선행은 주께서 배고파할 때에 먹을 것을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 주께서 목말라 하실 때에 물을 주어서 마시게 하였느냐 안하였느냐, 주께서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 주께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집에 모셔 와서 접대하였느냐 안하였느냐, 주께서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느냐 안주었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께서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보았느냐 안보았느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모두 인간의 행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영생에 들어가게 될 우편의 있는 무리들은 6가지의 행위를 하였고, 영벌에 처하게 될 좌펀의 무리들은 6가지의 행위를 하지 못했습니다.

영벌, 곧 지옥에 들어 갈 악인들이 특별하게 어떤 악행을 했나요? 그들이 다른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욱 악한 일을 했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옥불에 들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그 여섯 가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은 의인, 영생에 들어갈 자들은 이 여섯가지의 사랑의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 의할 것 같으면 지옥불에 들어갈 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마태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행위구원은 예수를 믿지도 않는데, 가난하고 병든 자,  즉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서 섬겼기 때문에 천국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에 의할 것 같으면 6가지의 선한 행동은 예수 믿는 믿음 속에서 나온 순종이라는 말입니다.왼편의 악인들은 생시에 선한 행위를 못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자들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왜 못 섬겼을까요? 예수 믿는 참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말하는 구원의 조건을 외면적으로는 살아 있을 때에 선한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로 보았지만, 내면적으로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고, 선한 행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참된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은 이 선한 행위를 누구에게 해야 합니까? 4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수의 형제들에게 선한 행위를 하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의 형제들이 누구를 지칭합니까? 예수의 형제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켐연장

2017.11.15 05:49:12

2017년 11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112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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