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부활에 대하여 헬라인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라는 것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죽음이후에는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 았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니 영혼이 다시 감옥과 같은 육체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몸의 부활을 인정하는데, 그 부활이 기껏해아 죽음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체로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사상은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몸의 부활을 믿는데, 특히 부활할 때에 우리들의 육체는 옛 육체가 아니라 변화된 육체 즉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부활할 때에 그런 신령한 육체로 다시 산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36-38절까지에서는 씨를 예증으로 삼아서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땅 속에서 죽어서 발아하여서 다른 모습으로 나오오듯이 우리들도 부활할 때에 옛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와진 육체를 가지고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39-42절 상반절 까지에서는 하나님이 다양한 육체들을 하늘.땅.바닷속에 두셨는데 서로가 구별되듯이 부활체도 그러하다는 설명입니다.
42절하반절에서 44절까지에서는 육의몸과 영의 몸의 대조가 나타나 있습니다. 육의 몸은 연약하지만 영의 몸은 강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45-49절까지에서는 아담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자들의 원형이고 영의 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원형이십니다. 예수의 부활하신 그 모습으로 우리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우리들의 슬픔의 날이 마쳐질 것이고 우리들의 옛몸인 육의 몸은 변화되어 신령한 몸이 되어질 것입니다.

녹음이 안되었기에 설교원고의 전문을 올립니다.

제목:우리의 부활체
본문:고전15:35-49
대상:ckpc
일시:3/23/08(새벽)

I. 서 론
        요한 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 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냈지만 나사로는 살 만큼 살고서 다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극작가인 유진 오닐(Eugene O'Neill)은 '나사로가 웃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나사로가 부활한 후에 나사로와 그의 식구들인 마리아와 마르다의 삶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소재로 다루었는데 그 중에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나사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을 경험해 본 그는 죽어보니 죽음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 보지 않았기에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한 신비가 우리를 더 깊은 공포와 절망 앞에 서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애 동안에 세명의 사람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죽은지 나흘되어서 무덤에 안치되어 있던 나사로를 우리 주님이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또한 12살난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또 우리 주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살리신 이 사람들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만, 모두 살 만큼 살다가 다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셈의 새 무덤에 매장되었다가 죽은지 사흘째 되던 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으셨던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다시 살아난 그 몸은 우리 주님이 다시 살리신 사람들과는 다른 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의 몸은 다시 죽지 않게되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체는 시간의 제약을 뛰어 넘을 수가 있었고, 또한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가 있고 다시는 죽거나 썩거나 하지 않는 그런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복음의 기초이고 우리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또한 그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II.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인 35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이 물음은 누구의 물음입니까? 겸허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물음이 아니라, 회의론자들의 물음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고, 다시 산다면 어떤 몸으로 살게 되는지 한번 설명해 보시요. 어디 우리가 한번 들어 볼 테니 말이요.’ 이런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헬라인들은 육체라는 것은 우리들의 영혼을 가두어 놓는 감옥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지만,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서 자유롭게 된다는 사상을 헬라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이해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무덤에서 썩고 부패하게 됩니다. 육체를 떠나 자유롭게 된 영혼이 무덤에서 썩고 부패하고 있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되는 육체속으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헬라인들은 생각하지요. 무덤에서 우리들의 썩은 육체가 다시 살아서 나온다는 것은 헬라인들에게는 우스쾅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헬라인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몸의 부활에 대하여 빈정대면서 냉소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런 회의론자들을 36절 초반부에서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몸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36-38절에서 예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아니하면 살아니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오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 귀절에서 바울은 땅에 뿌려진 후에 다시 살아나는 씨앗을 예로 들어서 몸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씨앗이 땅 속에 묻히게 되면 씨앗이 발아하여서 땅에서 솟아 나옵니다. 싹이 씨앗에서 나오는 과정은 씨앗이 죽어서 분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씨앗이 땅 속에 모래처럼 그냥 묻혀 있으면 싹이 나지 않습니다. 싹이 나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이 땅 속에서 죽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발아된 새싹은 씨의 모습과는 외관상으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밀에서는 밀싹이 올라오고 보리에서는 보리싹이 올라 옵니다.  그렇지만 밀 알갱이와 밀싹은 외관이 너무나 다릅니다. 보리 알갱이와 보리싹도 외관상 너무 다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뿌린 것과 똑같은 열매를 얻습니다. 밀에서는 밀을 얻을 수가 있고, 보리에는 보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씨를 예로 들어서 말하고자 하는 논점은 씨가 땅속에서 죽음을 거치면 다른 모습으로 땅위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의 죽은 육신이 무덤에 들어가서 썩지만, 부활시에 우리들의 썩은 육신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논점은 모두 똑같은 외양으로 살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전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 주는 그런 모습으로 다시 살아 나온다는 말입니다. 38절에는 하나님이 땅에 심겨지는 씨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의 싹으로 돋아 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일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두번째 단락인 39절에서 42절 상반절까지의 말씀을 보도록 하지요.: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같으니.  이 단락의 요지는 부활의 형체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모든 것을 하나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참 다양하게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체들, 해와 달과 별들을 다른 모양으로 만드셨습니다. 또한 땅에 속해 있는 생물들의 형체가 다양합니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하늘을 나는 새의 육체, 물에서 사는 물고기의 육체, 모두 다 다릅니다.  사람들은 손이 있고, 짐승들은 네발을 땅에 디디고 살고, 새는 날개가 달렸고, 물고기는 지르너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형체들이 다 다릅니다. 형체가 다르기에 영광도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다양한 형체들을 열거하다가 부활도 이와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 있어서 부활이 이와 같습니까?
부활체는 현재 땅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육체와는 다르지만, 다시 살아난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구별하여서 알아 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42절 하반절부터 44절까지에는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의 대조가 나타나 있습니다: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육의 몸이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natural body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육의 몸은 글자 뜻 그대로 이세상에서 생존해 있기에 적합한 육체를 가르킵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으며,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현재의 자연적인 생활방식에 알맞지요.
우리들이 현재 입고 있는 육의 몸의 성격은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고, 약한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의 몸은 썩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육의 몸은 연약합니다. 강하지 않습니다. 쉽게 깨어지고 부서집니다. 조금만 부딪쳐도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더운 것도 잘 견뎌 내지 못합니다. 추운 것도 우리의 몸이 참아 내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에 흙먼지에서 부터 우리의 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우리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바윗덩어리를 재료로 하여서 만들었더라면 우리의 몸이 바위처럼 , 그리고 무쇠덩어리처럼 강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의 몸은 흙먼지를 재료로 만들어 졌기에 연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육의 몸이 죽은 후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올 때에는 어떤 몸으로 살아납니까? 또다시 썩어질 그러면서도 연약한 이전의 그런 육체로 다시 살아납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때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몸은 영어로는 spiritual body로 번역되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영적 생활을 할 수가 있게끔 변화된 육체를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의 차원에 적합한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 신령한 육체는 썩지 않을 것이고, 영광스러울 것이고, 또한 강합니다. 우리의 부활체는 결코 썩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썩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활체는 이전의 육의 몸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수치가 사라지고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부활체는 이전의 육의 몸이 누릴 수가 없던 강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의 몸 때문에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령한 몸을 덧입게되면 우리들은 이전에 제약이라고 느끼던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현재는 우리들이 육의 몸으로 무거운 짐을 진자처럼 헐덕거리면서 살고 있지만 장래에는 우리들이 신령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 신령한 몸은 우리를 시간과 공간에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몸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5절-49절까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본 단락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 대조하면서 부활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사람은 아담이고 마지막 아담, 즉 종말론적인 아담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흙을 재료로 하여서 만들었기에 땅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은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아담은 육의 몸을 가진 생령이지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십니다. 왜 이렇게 바울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합니까? 그들은 육의 몸을 가진 자들과 영의 몸을 가진 자들의 대표이며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육의 몸을 가진 자들이 나왔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의 몸을 가진 자들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남으로써 우리는 육의 몸을 받았습니다. 이 땽에 속한 몸입니다. 그러나 장래에는 우리들이 영의 몸, 즉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고 될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들이 그 영의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에 가지신 그 영의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위에 육의 몸을 가지고 숨쉬면서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우리 육의 몸이 영의 몸으로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들이 살아 있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 있다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들이 들어간 무덤에서부터 우리들에게 영의 몸을 입혀 주시면서 살려 내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육체는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체의 원형이 됩니다. 아담을 통하여 육의 몸이 자손들에게 전하여 진 것 같이 예후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의몸이 영적인 자손들에게 전하여 질 것입니다.
IV. 말을 맺겠습니다.
헬라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들의 몸이 부활할 때에 우리의 몸에는 어떤 변화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첫단락에서 우리의 부활은 씨를 땅에다가 뿌리는 것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씨가 죽으면 싹이나는데 이것은 부활의 예증이라고 바울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에게 형체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형체들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다 다릅니다. 우리들이 죽음에서 부활할 때에도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구별되는 그런 영의 몸을 가지고 부활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은 아담을 통하여 그 후손들에게 전하여 졌지만 영의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래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남으로 육의 몸을 부여 받았지만, 우리들은 나중에, 장래에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즉 영의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죽음에 대하여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우리의 썩을 몸에 대하여 과도한 애착을 가지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빌3: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487 쏴보낸 화살(창49:22-26, 시127:3-5,사49:2-3) 김영호 목사 2010-02-22 4769
486 칭의의의(롬3:21-26) [1] 김영호 목사 2007-11-04 4762
485 07/06/17 포도주의 비밀 (요 2:1-11) - 장석정 목사님 [1] 관리부 2007-07-06 4742
484 주님의갈길,나의갈길(눅13:31-35) [1] 김영호 목사 2013-02-23 4737
483 교회여, 일어나 영광을 회복하라!(마16:13-20) [1] 김영호 목사 2007-08-06 4730
482 07년 7월 29일 - 여디디야 (사하 12:7-12, 16:20-23) - 보스톤한인교회 이영길 목사님 [1] 관리부 2007-08-06 4724
481 찬양하라(시148:1-14) [1] 김영호 목사 2007-12-31 4718
480 묵은땅을 기경하라(호10:9-15) 김영호 목사 2011-07-04 4705
479 달음질 하는 자(고전9:24-27) 김영호 목사 2012-02-13 4698
478 마지막기회(눅13:1-9) [1] 김영호 목사 2013-03-03 4677
477 다함이 없는 주의 인자(시36:5-10) [1] 김영호 목사 2007-01-17 4672
476 남은자사상(롬9:19-29) [1] 김영호 목사 2007-04-29 4669
475 새땅에서 행할일들(신27:1-10) [3] 김영호 목사 2006-09-11 4667
» 우리의부활체(고전15:35-43:3/23/08 부활절새벽) 김영호 목사 2008-03-24 4661
473 높은 곳을 바라보며(행1;6-14) 김영호 목사 2011-06-10 4646
472 영적성숙(히5:11-14) 김영호 목사 2012-06-15 4636
471 은혜 아래 있는 삶(롬6:12-23) file [1] 김영호 목사 2008-06-23 4636
470 왕의대관식(막11:1-11) 김영호 목사 2012-04-02 4626
469 마지막날의 심판(마25:31-46) file 김영호 목사 2008-11-24 4624
468 소망의 이유(벧전3:13-22) file [1] 김영호 목사 2008-04-30 4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