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현재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은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인데 이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구원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전인적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 되어 있는 우리의 전 존재가 구원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이해를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분들은 영혼 따로, 육신 따로 이해합니다. 이원론적인 구원은 영혼만 구원받으면 O.K.였습니다. 세상을 죄악 세상으로 정죄해 버렸고 육신도 죄악으로 썩을 육신이기에 무시해 버렸고, 오직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구원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전인적인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영과 육이 결합되어 있는 전인(whole person)이기에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구원은 영육이 결합된 전인이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는 그런 구원입니다. 지옥 불에는 우리 영혼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전인이 들어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에는 누가 들어갑니다. 우리의 영혼만이 들어가나요? 그러면 우리의 반쪽인 육신은 어디가 있게 되나요? 예수의 재림 이후에 있게 될 지옥에도 불신 인생들은 전인으로 들어가고 새 하늘 새 땅에도 예수 믿는 인생들이 전인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을 사도 베드로는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절대구원인 예수의 구원을 상대화 시키려는 비교 종교학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비교 종교학을 통하여 얻은 결론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모든 종교의 마침이 되는 구원은 같다는 말입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데, 동쪽 기슭에서 올라가던, 아니면 서쪽 기슭에서 올라가던 결국은 산 정상에 도달하게끔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 말이 진리라면 예수님을 믿던지, 아니면 공자님을 믿던지 아니면 부처님을 믿던지 모두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천국에서 한 자리에 모여 있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랬다면 예수께서 헛되이 죽었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국과 부처님이 불제자들에게 주는 극락은 엄연히 다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 진리를 우리는 절대 진리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도 하나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하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바로 그 길,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시험해 보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메시야이었기 때문에 그를 버렸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여서 성전의 집 모퉁이돌(11)로 삼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현재에 누리고 있는 구원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마모가 나 있는 구원관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다 보니 신앙생활의 참된 맛을 못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안을 똑 바로 뜨고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구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신앙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전의진목사

2015.04.27 08:36:57

04/26/15 주일 예배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5/04261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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