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설교 음성화일 링크 http://www.churchboston.org/sermon/032512.mp3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그려 내는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은 레위 자손 중에서 아론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론의 혈손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가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아론의 혈통에서 태어난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소속되어 있는 지파는 유대 지파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론이 후손이 대제사장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방식은 바로 멜기세덱이 대제사장 되는 방식으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 대제사장 된 방식으로 우리 주님은 우리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대제사장됨으로써 이루신 업적이 무엇입니까? 그는 9절 후반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구원의 저자, 구원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이전에는 알수도 볼 수도 없었던 그런 구원을 우리 주님 예수께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영원히 지옥의 불타는 곳으로 들어가야 할 인생들을 우리 주님은 그런 형벌로 부터 우리를 건져 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영원한 구원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이 했던 일은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매년 일곱번째 달(티슈리 월) 열흘째 되는 날, 이날을 욤키프르라고 부릅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기 위하여 소와 양을 잡아서 피를 양푼에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뿌렸습니다. 직전 컨택스트인 히5:1절에는 대제사장은 속죄하는 제사를 드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사를 드린다는 이 동사가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 아버지께 자신의 간구와 소원을 7절에서는 올렸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올렸다라는 동사가 구약의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렸다라고 할 때에 사용한 동사와 같습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 마네 동산에서 내 뜻 보다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를 원하나이다라고 울면서 자신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드린 것을 제사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다음에 다음날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기도와 십자가 위에서 몸을 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인생들을 구원하는 속죄의 제사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예수의 구원행동이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는 반드시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비슷하게 되어서는 안되고, 예수는 반드시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생들의 중간에 서 있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분이어야 하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8-9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받은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웠고, 그 순종함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비슷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꼭 같은 그런 본연의 인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성경 여러 곳에는 예수는 죄가 없다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러 고난들을 통하여 순종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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