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이 글은 수련회 기간 중 네 번의 말씀 중 세 번의 설교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하며 생긴 깨달음에 대한 글이다. 수련회의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훈훈한 공동체의 분위기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도 클텐데…. 깨달음에 대해 나누는 사람이 한 명쯤 있는 것도 수련회에 참여하지 못한 지체들이나 공동체의 열린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 소심하게 망설이다 글을 올린다. 내가 들은 강사 목사님의 설교 원제는 각각 <샬롬의 신학>, <WWJD>,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였다.

#1. <샬롬의 신학에서 샬롬의 간호학으로>
복음이 무엇인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그 이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존재했던 영적, 심리적, 사회적, 생태계적 샬롬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자아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아가 이웃들과의 관계와 생태계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그런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간호학 강의를 듣는 듯한 착각을 했다. 이미 World Health Organization에서도 ‘건강’의 정의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안녕상태라고 정의하고 있고 기독간호사에게 있어 추구해야 할 ‘건강’은 ‘샬롬’ 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간호의 대상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인 나에게 있어서 샬롬의 회복은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온다.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지만 그 전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고, 인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하고 그래야 죽음 앞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고,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편안한 헤어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궁극적인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를 비롯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분야의 간호사는 어쩌면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인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 시간에 샬롬의 회복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마지막 크리스찬일 지 모른다.  

#2. <WWJD: Who would help Jesus be dignified in His end of life?>
“What would Jesus do?”의 패러디 버전인 “Where would Jesus dwell?” 이라는 단순하지만 심각한 물음에 반응하여 필라델피아 흑인 빈민가로 들어가 살며 그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는 강사 목사님의 말씀. 설교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WWJD로 되묻는다. “Who would help Jesus be dignified in His end of life?”  

예수님 조차도 그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해가고 싶으셔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지만, 기도 가운데 예수님은 그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속 받게 되는 잃어버린 영혼들…… 그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셨음을…. 하나님과의 샬롬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만든 가장 근원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에는 그의 죽어가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거나 심지어 부인하며 뿔뿔히 흩어진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 순간과 그 이후”를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우연이었지만 골고다의 길을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른 구레네 시몬이 있었고, 십자가 상에서 주 되심을 깨닫고 구원을 간청했던 십자가 우편의 강도가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한 요한이 있었다. 필요한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었고, 새벽에 부리나케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와 결국엔 부활의 증인이 된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오늘 병원에 한 병자의 모습으로 오실 지 모르는 또 다른 예수님을 위해 그 마지막을 존엄하게 지킬 사람이 누구인가? 오늘날 그 시간,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 중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돌볼 사명”을 위탁 받은 나와 내 동료들과 제자들이 아닌가….

#3.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의 가족이 되어…… >       
광야에 모여 설교를 듣던 오천 명을 위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생각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 수중에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데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이야…’

헉! 그렇다. 나에게는 오천 명의 무리들을 먹일 재주가 없다. 내가 아무리 샬롬의 간호학으로 무장을 하고 Who would help Jesus be dignified in His end of life? 라는 심각한 수준의 질문에 반응을 하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고 싶은 열정 있는 제자라 할지라도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아직도 학위과정 중인 아줌마 학생이다. 내가 가진 재주는 아주 느리지만 천천히 지금까지 일하고 공부하면서 배우고 들어온 조그만 것들과 그에 대해 조금씩 정리해 가는 생각들….. 나보다 훨씬 능력 있고 가진 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만한 것들….. 내가 무엇으로 죽어가는 환자와 그 가족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존엄을 유지하게 만든단 말이지….. 보험제도를 바꿀만한 능력도 없고, 최첨단 의료기술을 동원하여 살 수 있을 환자인지 아닌지에 따라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의료문화를 바꿀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 중 한 명’이라며 의료인들에게 교육시켜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고…..

“당신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일 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료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여러 경우의 수를 앞에 두고 환자나 가족이 흔히 되묻는 물음이다. 내 친정 아버지의 마지막 5개월을 함께 살며 그 실체를 경험하기 전에, 내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함께 겪어가기 전에는 다른 간호사나 다른 의료인들보다는 좀 더 센 강도이긴 하지만 그저 그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추상적인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이 내 가족이나 친구이다 보니 대하는 마음이 더 절실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내게 주신 사명은 오천 명을 다 먹이는 그 엄청난 것이 아닐 지 모른다.
지금 내게 맡겨진 환자와 가족이 내 가족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고 전달하는 나의 돌봄..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도록 내 후배와 제자들에게 내 작은 깨달음을 나누는 것….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의료제도나 의료문화를 바꾸라는 거창하고 폼나고 원대한 사명이 아니다. 내가 대하는 환자들, 학생들, 동료들에게 “가족의 입장”으로 그들의 샬롬의 회복을 위해 내 마음을 나누는 일….  이것이 내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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