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오늘 본문 말씀은 오직 누가복음에는 수록되어 있는 기사입니다. 사회적 약자 그룹인 과부에 대한 배려와 관심 때문에 누가가 수집하여서 편집하지 않았나 생각되어 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인성에서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칩니다. 장례행렬 속에서 터져 나오는 과부의 울음 소리를 들으신 우리 주님께서 관 속에 뉘여져 있는 과부의 아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이 사건은 나인성문 밖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옛 사건인 이 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첫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망은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들을 여위게 된 과부는 모든 희망을 잃어 버리고 삶의 의욕마져도 상실했습니다. 큰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런 절망 속에 빠진 과부를 우리 주님이 찾아서 만나 주셨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과부에게 우리 주님은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소망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들에게도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하여 우리 주님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은 새로운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절망에 빠져 있는 이 과부를 위하여 우리 주님이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그 과부를 불쌍히 여겼고, 그 과부의 아들을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함으로써 그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불쌍히 여긴다면 그릭 단어는 마음으로 동정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 과부를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 속에는 이미 그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도움을 주겠다는 것 까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도 죽은 청년이 살아나는 것 같은 기적을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 기적을 통하여 일어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인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인성 청년을 살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시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이제는 더이상 버림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거침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디딤돌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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