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아래 설교는 대구성서아카데미 (http://dabia.net)에서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를 옮긴 것입니다. 다소 길더라도 성탄이 지나가는 이 시점 즐거움 이상을 원하는 성도들에게 좋은 묵상이 될 것 같아 소개합니다. 아래 댓글로 한 선교사가 올린 글도 함께 붙입니다.

    
성탄에 참여하는 길                                                    정용섭 목사
2007.12.25. 사 62:6-12

낭만적 성탄 넘어서기

오늘 우리는 2007년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 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오늘 성탄절 예배를 드리면서 큰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성탄 절기에는 연말연시가 겹치기도 해서 흥겨운 기분에 젖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교우들이 살고 있는 이런 지방에서는 성탄절의 분위기를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경험했던 서울의 명동이나 요즘의 강남 번화가에는 성탄절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을 겁니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 반짝이는 성탄추리, 흥겨운 캐럴, 선물 등등, 성탄절의 기분을 돋우는 것들은 많습니다. 영화, 연극이나 음악회를 가는 사람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겠군요. 모두가 이 세상의 즐거움을 확인해 줄 수 있는 한 순간들입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삶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흥겨움은 곧 지나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받은 성탄선물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우리가 지난 성탄절 때마다 경험한 정겨운 추억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그것이 아무리 감미로운 추억이었다고 하더라도 세월과 더불어서 빛바랜 사진처럼 시들해지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 여성분들에게 그런 경향이 흔히 보이지만, 점점 아득해지는 추억을 되살리고, 낭만적인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를 억지로 맞으려는 데 불과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삶을 비관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실체를 정확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단지 성탄절의 기분에 들뜨지 말고 성탄절의 참된 의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한 대목을 기억하시나요? 성탄절과 연결된 이야기는 모두가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에도 그런 기억으로 가득할 겁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 그 앞에 경배하는 동방방사들, 그 위에서 찬송하는 천사들은 우리가 명화에서 자주 본 모습입니다. 한 밤중에 천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나심을 전해들은 목동들의 모습도 목가적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이 모든 장면의 주인공은 바로 아기 예수이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는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죽을 때의 나이도 서른세 살에 불과합니다. 지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즐거워하고 있을 때인가요?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의 그런 운명을 예측했다면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요?
저는 성탄절에 맛보게 되는 흥취와 즐거움을 빼앗으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분이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사실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주 초기 기독교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이 있겠지만 성탄절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차츰 교회력의 중요한 날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날짜가 12월25일이 된 것도 로마가 섬기는 태양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가 지난 12월25일은 로마에서도 큰 축일이었는데,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성탄절이 그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에 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셨다면,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굳이 오늘과 비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기복역하고 있는 사상범들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형편에 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즘 우리처럼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성탄 추리를 하고, 칸타타를 부를 여유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골몰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거지요. 지금이야 우리가 그가 누구인지 잘 알지만, 또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하신다면 이 세상이 뭔가 좀 달라져야하는 게 아닌가요? 예수님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사셨습니다. 이 세상은 그 전과 후가 달라졌나요? 실제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이나 그 후나 사람들은 병에 걸리고, 장애인들도 여전하고, 악한 사람들이 잘되기도 하고, 죄가 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다가 늙어서 죽습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이 오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2천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과 전체 우주를 구원하실지 우리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구원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정체를, 그의 운명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할 그때를 지금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대림절이며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타는 목마름으로’ 성탄절을 맞으시나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차원에서 낭만적인 기분에만 휩싸여 있으신가요?

구원하실 이

예수님이 오시기 5백 년 전에 이미 이사야는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구원하실 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그 당시 유대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예언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의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이사야의 기다림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상당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예언했습니다. 물론 상황이 편하면 예언자가 필요 없겠지요. 유대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하기는 했지만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개의 예언이 어땠는지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너희는 야훼의 성전 주추를 놓은 구월 이십사일, 바로 이 날부터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 눈여겨보아라. 곳간에 둔 종자가 줄어드는지,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가 열리는지 안 열리는지 두고 보아라. 나는 이 날부터 복을 내리기로 하였다.”(학 2:18,19) 성전 봉헌식은 기원전 515년에 있었는데, 그 뒤로도 국내외 정치적 상황도 그렇고 삶의 형편도 나빴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실망했을는지 상상해보십시오. 바벨론 해방, 성전 재건, 하나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발견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다시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번영을 구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사야는 다시 예루살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 위에 보초를 세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초를 세운다면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나라에게 침략당하는 일도 없겠지요. 그 보초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도록 깨우는 역할도 있다고 했습니다.(6,7절)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의 맹세를 이렇게 전합니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내주지 아니 하리라.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외국인들에게 너의 포도주를 내주지 아니하리라.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8절)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이 좀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군요. 가능한대로 남과 나누어 먹도록 가르치는 게 옳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웃나라에게서 얼마나 무참하게 당했는지를 알아야만 이해가 됩니다. 모든 걸 억울하게 빼앗겨본 사람에게는 이런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한을 풀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최소한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수 있으며,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게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마저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이 지켜준다고 예언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11절 말씀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합니다. “너를 구원하실 이가 오신다.”고 했습니다. 구원하실 이는 자기가 찾은 백성을 데리고 시온, 즉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그들은 이제 거룩한 백성으로, 야훼께서 구해내신 자들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이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가 된다고 합니다. 패잔병 같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버려진 도시 같은 예루살렘이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니라 구원하실 이가 이루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오신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을까요? 안타깝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지 않아 절망하고 있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들었지만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언자들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걸 신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사야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책임일까요? 그런 예언을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이 책임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이 사태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역사적 책임

우리는 지금 풀기 힘든 문제 앞에 섰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신탁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사야 뒤에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고, 기원 1세기에는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습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우리는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성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받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집중했다면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을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였겠지요. 이러한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질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지 못한 책임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은 구약 전체를 통괄하는 완전한 예언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예수가 오신 성탄이라는 예언을 우리가 들은 것입니다. 이 예언이 이 역사에서 실현되었나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예언의 성취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메시야가 오셨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이 아직 실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실체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탄은 여전히 예언입니다. 그 예언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종말의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아직 우리는 종말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이 역사 중간에 성탄의 예언을 들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탄의 역사적 책임을 우리가 감당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 책임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게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생명과 역사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걸 가르쳐줄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영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성탄의 역사적 책임을 지면서 사는 게 무엇인지 여러분이 처한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정말 막연하다고 생각된다면 여러분은 평소에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거나, 아니면 생각하더라도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는 걸로 아시면 됩니다. 철이 난 자녀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도와할 일이 무엇인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지만, 철이 나지 않은 자녀들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저도 신앙적으로 철이 나지 않은 사람에 속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방향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영혼의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은 단순히 성탄 찬송을 부르고, 카드를 주고받는 일로 인해서 좋은 기분이 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구원이 이 땅과 역사에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곧 완전한 구원이 실현될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믿으십시오. 믿기 전에 그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십시오. 이해하고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역사에서 무슨 책임을 감당해야 할는지 성령이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건 단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또는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위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서, 나와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각각 할 일이 있겠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 일에 매진하겠지요. 이런 삶이 바로 우리가 성탄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2007년 성탄절을 맞아, 성탄의 참된 의미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댓글 (히말라야님)

정 목사님,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을 열었더니
목사님 성탄 설교가 올라와 있어서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소리내서...

읽으며 제가 갖고 있는 큰 고민 중의 하나가
목사님 설교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소망도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 요즘 저는 선교사로서의 동력을 잃고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엔진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느낌입니다.
컴류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작동되지 않는게 이런 느낌일지요.
하드를 다시 포맷하고 새로운 operating system을 깔아야 할 것 같은 느낌...

동력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을
제 나름대로, 제 의식 수준에서 분석해 보면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물론 일상생횔이지만)해도
제가 속한 네팔의 영역은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개선을 바라고 애썼던 의과대학은 오히려 붕괴되어 가는 듯하고
마음을 쏟았던 지역교회는 담임목사의 타락으로 안에서 곪고 있고
아내가 혼신을 쏟았던 마을은 사막에 물 한 양동이 부은 정도이고...
더욱 힘들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과 공동체들도
예수의 이름만 부를 뿐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한다는 것은 무슨의미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어떻게 된다고 말해야 할지
메시지를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으 무엇을 말하는지..
교회 나오는 분들 중에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반이 안됩니다.
읽을 수 있는 분들도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구전문화권의 사회라 그런지 듣고 외우고 감동하고 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며 미래의 소망을 말하기에는
그들의 현실의 삶이 척박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쳐 줄 대상이 없습니다.
네팔의 교회가 그렇고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도 그렇고
그들이 기독교 국가라고 믿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세계에서 저지르고 있는 부당한 처사가 그렇고...
그렇게 가다가 저 자신을 보니
저 자신도 예수 믿고 별로 바뀐바가 없군요.

이렇게 생각 속에서 헤매다 보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민은 이미 선배 선교사들과 목사님들이
벌써 하셨고 하시고 계실 것이 틀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유산에 접근해서 해결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에서
우리가 역사에서 해야할 일을 발견해야 한다 하셨는데
그 발견된 일을 하려고 노력해도 세상과 자신이 변하지 않는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요...
10년을 가까이 선교에 몸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전해야 할 자신의 메시지를 잃어 버린 느낌...
참으로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어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곳 캐나다에서 만나는 교회의 친구들에게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지난번 안식년 동안 이곳에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쳤는데
지금와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갑자기 불분명해지는 느낌...

제가 아는 모임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산을 올랐는데 어느날 느낀 바가
'이 산이 아닌가봐....'

이런 생각의 혼란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생각을 정리할 때
먼저 던져야 할 질문들을 좀 가르쳐 주십시요.
07·12·26 20:20  


댓글 (정목사님)

   히말라야 선교사 님,
제 가르침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직면한 그런 문제의식 자체가 이미 대답을 향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대개 그런 근본적인 고민이나 질문조차 하지 않거든요.
그런 상태에서는 답을 향한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제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말은
더 근본적으로 저에게 가르침을 드릴만한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껏해야 저는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히말라야 님은 네팔에서
의료행위로, 성경공부로 실전을 많이 치루셨잖아요.
그든 영적, 인간적 에너지를 소진시켰잖아요.
그런 분에게 이렇게 책상물림 비슷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러나 간혹 지나가다가 얼떨결에 줒어 들은 말도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을 줄 때가 있듯이
그런 작은 소망으로
제 말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지만
몇 말씀만 드릴께요.

사람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고민이 많으시군요.
네팔에 뿌린 씨앗이 큰 결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현실 앞에서
겪게되는 불안이겠지요.
그 심정을 저도 잘 압니다.
저도 현풍에서 10여년 목회했지만
교회를 성장시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 지역사회에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히말라야 님은
제 설교에서 짚었던 메시아 문제와 연결하셨군요.
그게 세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메시아적 구원통치가 담지한
신비한 능력을 엿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폐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드러난 모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악한 권세가 굴복했다는 것은
은폐된 현실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 같다는 바울이 진술이 바로 이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언젠가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삽니다.
그 날을 향해서 용맹정진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네팔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무엇이 변화일까요?
저는 설교비평을 하면서
목사들이 신자들의 변화를 너무 강조하는 건
설교의 근본이 아니라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한 거지요.
그런 변화가 아니라면 도대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글에서 여러번 지적했으니까 여기서는 접겠습니다.
비록 변화되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는 씨를 뿌리기만 하면 거기에 은폐된 하나님의 메시아적 구원통치가
언젠가는 이 현실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 아닐까요?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강하게 말하는 걸 용서하기 바라며,
지금 히말라야 님이 네팔 사람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는 건
네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히말라야 님 자신의 문제가 아닐는지요.
겉으로는 네팔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이 영적으로 빈곤한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제가 그렇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문제는 우리 자신이더군요.
내가 진리의 영과 소통하고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히말라야 님에게는 네팔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천착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하나님 나라, 종말, 칭의, 복음, 구원, 창조 등등,
하나님의 세계와 관련된 공부도 필요하겠고,
영성이 깊은 선생들과의 교제도 필요하겠지요.

말이 많았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이 아주 실질적이고
그 태도가 진솔해서
저도 덩달아 진지한 모드로 바뀐 것 같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나가는 말로 들으세요.
성령께서 좋은 길을 열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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