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글 순서가 꼬여서 지우고 다시 올리려는데 비밀번호 입력란이 안 떠서 안되네요.
이것도 예전 글입니다. 읽으신 분들도 많을테니 넘어가시고, 켐장 와서 겪은 '지인'의 기록들을 정리해 올리다 보니 반복합니다. 2005년 봄, 2년 전에 석사과정으로 와서 박사과정 입학 통보를 기다렸던 때의 일이지요.

Leap over a wall

By You I can crush a troop, and by my God I can leap over a wall(시18:29).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부르심에 대해, 나의 약함에 대해, 꿈 속에서조차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나의 ‘가시’에 대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분의 사랑에 대해.

그러기 위해, 잠깐 시간을 뒤로 돌려 봅니다. 아래는 제가 카투사로 군생활을 하던 때의 이야기로, 당시 다니던 교회의 청년부 회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97년 6월 21일.

" 당신이 가진 '가시'는 무엇입니까?  희수가 대답해 줄래? "
리더모임. 내일 성경공부의 주제는 '낮은 자존감'.
" ..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그것들은 남들보다 못난 부분이 아니라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
" 그래요. 광훈이는? "

희수왈 -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 95년 8,9,10월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뜨거운 것이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뜨거운 여름. 논산 훈련소의 흙먼지와 함께 나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운동신경과 체력은 내게 있어 좌절감과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최악의 영역. 그리고 군입대. 이 부분이 몇년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도전 받는 시험장이었다. 과연, 과연 내가 이 체력과 운동신경으로 군 생활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논산에서의 1달의 훈련. 아침 구보 때마다 남몰래 숨이 차서 헐떡여야 하고. 팔굽혀펴기를 할 때마다 조교의 눈을 피해 배를 깔아야 한다. 행군할 때마다 나도 모르는 새 남보다 먼저 체력이 떨어져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마치 예민한 기계를 다루듯이 시마다 때마다 돌보고 점검하고 지켜야 하는 내 몸. 그 조심성 때문에 아무 일에도 떳떳하게 앞장서지 못하고 최대한 남에게 미뤄야 했던 비겁함. 너무나 자주 상처받아 더이상 아프지도 않은 상처 입은 자존심. 체력측정 수치가 드러내는 열등함. 나도 이러고도 남자인가.
평택에 옮겨와서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체벌, 운동 때마다 조마조마한 마음,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보내야 했던 두 달. 미군에는 PT Test라는 제도가 있어 모든 병사가 6개월에 한번씩 테스트를 받아 통과해야 한다. Push up(팔굽혀펴기), Sit up(윗몸 일으키기), 2Mile run(2마일 달리기) 세 종목이 있고 나이와 성별에 따라 점수가 다르게 매겨진다. 나는 2분간 푸쉬업 42개, 2분간 싯업 52개, 16분내에 2마일 주파가 통과 하한선(각 100점 만점에 60점)이었다. 달리기야 별 문제 없었지만 푸쉬업과 싯업은 둘 다 낙방. 낙방자들만 모아 일과 후에 연습을 시켰다.
비참하게도 언제나처럼 이 집단에 끼어있는 나. 1달간의 연습으로 실력은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재 테스트. 기도했다. 제발 붙게 해 주세요. 다시 낙방. 그럼 그렇지. 'PT 낙방'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자대로 배치되게 되었다. 언제나 난 이런건 못했었지.

성경공부 왈 -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좌절하거나 싫은 감정에 빠져 있습니다..  : 95년 11월.

" 이 새끼가! "
" 신병이 죽으려고 PT를 떨어져서 와! "
" 푸샾 준비! 100회 실시! "
" 얼씨구 죽을라 그러네. 안 올라와? "
푸쉬업, 싯업, 푸쉬업, 싯업, 푸쉬업, 푸샵...   하루에 몇백 개를 했을까. 아니, 워낙 못했으니 몇백 개나 하지도 못했었을 거다.
" 왜 하필이면 네가 우리 1소대로 온 거야? 제일 고문관 같은 놈이. 다들 너 싫어하니까 알아서 잘 해. "
" 야, 이번 신병은 왜 저 모양이냐? "
" 이번 달에 있는 PT test 또 떨어지기만 해봐. "
자대. 오자마자 욕설과 해괴한 기합과 모욕으로 뜨겁게 환영해준 곳. 첫날 이촌동 한강 고수부지에 차로 데려가 마구 굴리던 곳. 나를 반기기는커녕 미워하던 곳. 이 지옥 같은 곳이 앞으로 군 생활을 보낼 자대라니. 살아남기 위해서 연습했다. 샤워장에서, 방에서. 테스트를 일주일 앞두고 혼자서 실력을 측정했다. 합격선 통과. 최초로. 울 수만 있었다면 울고 싶을 정도로 기뻤던 그 저녁. 나도 할 수 있다.
        청년부 부흥회를 이틀 앞둔 아침. 이병 유광훈, 자대에서의 네번의 PT Test 가운데 첫 번째의 테스트에서 생애 최초로 합격선을 돌파했다.


성경공부 왈 - 성경에서는 열등감을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것들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욱 귀히 쓰게 되는 동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 96년 5,6월.
  
5월. 일병 유광훈. 두번째 PT Test 때가 되었다. PT를 합격한 뒤 오랜만에 다시. 설마 떨어지는건 아니겠지. 이번 테스트에서 나를 측정하는 건 썸터 중사. 느글느글한 사람. 푸쉬업 시작.
" 자세가 안 좋잖아. 좀 더 내려가. 그렇지, 그렇게. "
2분내에 40개를 넘겨야 하는데 처음에 쉬지 말고 최대한 많이 해 둔 다음 쉬면서 몇 개씩 개수를 늘려 가는 것이 요령. 25개에서 30개만 단숨에 한다면 40개를 넘길 수 있다.
한 40개쯤 했을까. 1분 경과. 문제없군. 근데 왜 개수를 안 세어 주는 거야?
" 내가 지금까지 몇 개 했지? "
" 20개. 빨리 해. 떨어지기 싫으면."
뭐라고. 그럼 절반 정도는 자세가 안 좋다고 안 세어 줬단 말야. 그걸 이제 와서야 말해주면 난 어쩌라고. 매번 개수를 불러줘야 자세를 교정했을 거 아냐.
당황. 힘이 빠졌다. 10개 남짓밖에 더 못했다. 못된 놈. 심술을 부리다니. 낙방.
무슨 정신으로 나머지 싯업과 런을 마쳤는지. 하늘이 노랗다. 낙방. 또.
분대장인 병장들, 소대 고참들 얼굴 보기가 두렵다. 어떻게 떨어졌다는 말을 하나.
징계는 가장 경미하게 주어졌다. 다음에 꼭 붙으라는 꾸중. 그리고 벌로 주말 근무는 당분간 내가 전담. 다시 한번 매일 낙방자 훈련에 투입되었다. 또 한번 뭉그러지는 자존심. 난 역시.. 그리고 낮아지는 마음. 훈련소를 기억하며, 별 볼일 없던 이병 시절의 어려움에서 건져내신 그분을 기억하며, 매일 초여름의 하늘을 바라보며 운동을 했다. 매일 PT를, 운동을 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님을, 힘든 운동 뒤에 씻고 샤워장을 나서는 상쾌함을, 나날이 늘어가는 나를 지켜보는 뿌듯함을 배웠다. 내 가시가 축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순간.
3주 뒤의 재테스트. 가볍게 푸쉬업과 싯업을 통과. 마지막 런은 뛰기만 하면 절대 떨어지진 않으니까 안심. 달린다. 6월의 아침은 덥다. 숨이 차고 땀이 흐른다. 목이 마르다. 군입대 후 달리며 힘들 때마다 부르짖던 하나님. 잊고 있었는데. 다시 주를 부른다. 가슴이 터져나가도록. 그분의 호흡이, 숨결이 나를 움직이시도록. 나의 다리와 허파와 근육과 땀과 숨결을 사로잡으시도록. 주와 함께 달린다.


성경공부 왈 -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긍정하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부분은 당신의 자존감을 낮게 하거나 당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쓰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96년 12월

상병 유광훈. 많이 높아졌다. PT 못한다고 구르던 시절이 있었지. 옛날 얘기다. 그래도 PT Test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제 와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누가 무서워서 문제가 아니라 고참 체면 문제다. 상병이나 되어 떨어진다면 쪽팔리지. 그래서 미리 한달 반 전부터 맹연습. 하루에 백개씩.
        12월 18일. 테스트날. 은근히 긴장되고 떨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 뭐 아무일 없이 붙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기우. 이럴 때 쓰는 말이지. 무난히 푸쉬엎 싯엎 모두 통과. 하하.
런. 겨울이라 춥다. 지난번엔 더워서 혼났는데, 차라리 추운 게 낫지. 다시 한번 숨이 차오른다. 생각한다. 힘들 때마다 그랬듯이. 이곳, 교회와 집에서 너무나 가까운 이곳에 나를 데려다 주신 하나님. 그리고 내가 지금 누리는, 군인이 누릴 수 없는 군 생활. 저기 바라다 보이는 우성아파트. 저 너머엔 교회가. 저기 보이는 신동아 아파트. 지금쯤 부모님은 일어나서 아침식사중이시겠지. 오늘 PT 테스트만 끝내면 내일모레부터는 내년까지의 사실상의 휴가가 기다리고 있다.
뒤에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따라온다. 뭐지. 가르시아 병장 녀석이군. 이 아저씨가 감히 나를 제치려고? 흥이다. 휙 달아났다. 다시 씩씩. 까무잡잡하고 땅딸막한 귀여운(?) 멕시코계 가르시아. 또야. 흥. 다시 달아났다. 마지막 바퀴. 다리 힘이 빠진다. 다시 씩씩. 아, 지면 안 되는데.. 까무잡잡한 땅딸보가 기어이 나를 제치고 먼저 골인. 아저씨한테 지다니.
총점 237점. 전과 비슷하군.

성경공부 왈 -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 실패, 불완전한 것, 연약한 것들을 변화시키며 그것들을 이용해서 영적 성장과 성숙에 이르도록 해줍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당신의 가시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 97년 6월

21수송중대의 실세 왕고참 1소대 분대장 병장 유광훈. 부제: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랴.
모두들 내게 제대가 언제냐고 묻곤 한다. 그럼 난 씩 웃으면서 10월이요, 얼마 안 남았죠? 한다. 마음만 먹으면 휘하(?) 17명 카투사의 군 생활을 얼마든지 멋대로 망쳐놓을 수 있는 분대장. 화를 내어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내가 눈썹만 부르르 떨어줘도 다들 벌벌 떨지 않을까. 그런 내가 PT를 떨어진다고 누가 뭐라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참이 되어 깨달은 것은 졸병 때는 고참이 무서워 신경이 쓰이지만 고참이 되면 졸병들의 말없는 시선이 똑같이 두렵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나의 마지막, 네 번째 PT Test가 다가왔다. 그다지 연습은 안 했지만 병장이 되고 나서 밖으로 근무를 안 나가니 PT 시간에 매번 참석했던 것이 충분히 연습이 되고 남으리라 생각된다.
6월 18일. 마지막이다. 이번만 끝나면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테스트에 안 시달려도 된다. 제대다. 야호. 어느새 마지막이다. 그리고 한 번 잘 해볼 기회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테스트가 주는 은근한 스트레스 - 밤마다 먹던 것도 절제하고, 어제 밤엔 전도사님 생일잔치에도 못 가고 일찍 자게 하는 - 는 제대 때까지 변함이 없나보다.
푸쉬업. 이미 정복한 영역. 준비. 한 30개는 단숨에 할 수 있겠지. 시작. 파바바박. 20개, 30개... 어 아직 지치질 않네. 30초 경과. 42,43,44,45개. 이제 쉬었다가 더 하자. 5초, 4초, 3초... 68,69,70개.
90점. 90점! 하하하.  옛날에 푸쉬업 떨어져서 자대에 온 유광훈이라는 신병이 있었지. 나를 곯리던 푸쉬업에 복수했다. 통쾌.
싯업. 좀 걱정되지만. 괜찮겠지. 준비. 시작. 45,46,47개. 좋아 합격선은 넘었고. 5초, 4초... 62,63개.
76점. 너끈히 통과군.
이제 이번만 힘들게 뛰면 다 끝이다. 런. 준비.. 땅!
정말 덥구나. 벌써 땀이 흐르다니. 겨우 아침 7시인데. 작년 6월 18일에 뛸 때도 이렇게 더웠었나. 다들 앞서 나간다. 우리 소대 일/이병들인 재형이 은갑이 기창이 규일이 모두. 그래 다들 앞질러 가라고. 난 슬슬 뛸 거니까.
씩씩. 이 숨소리 기억난다. 또 이 녀석이 뒤에 붙었구나. 또 따라잡혀서 지면 어떡하지.
좀 힘이 들기 시작한다. 벌써. 아직 한바퀴도 안 돌았는데. 이제 마지막이다 마지막. 주님. 마지막이군요. 그동안 .. 감사했어요.
뛰자. 주님과 함께.
은갑이. 제쳤다. 안녕.
입대동기인 재구. 지지 않으려 달아나네. 한번 해 볼까. 나란히 달린다. 재형이도 제쳤다. 요새 군대 많이 좋아졌다. 일병이 병장한테 지고. 옛날 병장들은 " 나보다 늦는 놈은 죽어! " 하고 뛰었었는데.
재구가 떨어져 나갔다. 잘가.
이제 마지막 바퀴.
저건 이병 규일이구나. 녀석은 원래 별로 잘 못 뛴다. 대학원생. 공부만 하다 와서. 나도 졸병땐 군기로 뛰었지. 헉 헉. 제쳤다.
저 모퉁이만 돌면 결승점이 보인다. 덥다. 힘들다. 다리가 아프다. 숨이 차다. 앞에 이병 기창이가 뛰고 있다. PT 떨어지고 요즘 매일 보강운동 한 녀석이라 못하려야 못할 수가 없다. 씩씩 소리는 아주 가까이 쫓아왔다. 속도가 떨어진다. 쫓아오는 병장을 눈치챈 기창이가 내닫는다. 씩씩 씩씩은 더 가까이. 곧 저번 테스트 때처럼 역전 당하겠군.
해가 떠있다. 맑은 하늘. 이병 일병 상병 병장. 네 번째 PT 테스트. 참 먼 길을 왔다. 함께. 주님, 제가 이 마지막 경주에서 이긴다면 이 일을 글로 쓰겠습니다. 영광을 주께 돌리겠습니다. 그분의 숨결이, 호흡이 다시 한번 내 안에 스며든다. 내 호흡을 주장하고 피를 순환시키고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씩씩 소리가 뒤로 멀어져간다. 기창이가 점점 커진다. 녀석은 울상인 것 같다. 말년 병장한테 지다니.
결승점. 응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로렌스 하사의 목소리. " 13분 35초! "  하아 하아. 90점.
기창이도, 가르시아 병장도, 규일이 재형이 재구 은갑이. 모두 내 뒤에 골인. 하아 하.
합계가 256점. 체력이 웬만큼 좋은 사람이나 받는 점수를. 내가 이 점수를 받다니. 지난번보다 20점 가량 향상. 오히려 점수가 올랐군. 기쁘다. 나도 잘 할 수 있다니. 운동인데.
가르시아 병장은 251점을 기록. 다른 우리소대 애들도 모두 내 밑 점수. 소대 1등이구나. 내가. 내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역시 땀으로 범벅이 된, 여전히 까무잡잡하고 땅딸막하고 장난감 같은 가르시아에게 다가갔다. 저번엔 졌지만 이번엔..
"Hey, I won this time! Haha.. "
다들 결과를 보고 놀라겠지. 난 알지. 누가 나를 기쁘게 하시는지. 누가 나를 웃게 하시는지...

97년 6월 22일 새벽 12시 13분. 약속대로 나눔을 다 쓴 병장 유광훈 눈앞에.
성경, 아니 하나님 왈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그 뒤, 제대하고 운동을 그만둔 유광훈은 매년 꾸준히 번성하여 몸집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92년. 햇병아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앞길(즉, 학과 선택)을 하나님께 맡겼고, 그분의 응원을 받으며 동양사학과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나도, 가족도, 교수들도 모두 이제 동양사학자로서 성장과 성공의 길에 들어설 줄 알았다.
92-95년. 하나님과 첫사랑에 제대로 빠졌고, 교회 청년부와도 사랑에 빠지며 대학을 등졌다. 성적과도 등을 졌다. 졸업하고 신학의 길을 가리라는 생각이었기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95-97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로 기억하게 될 군생활. 하나님과 함께 달렸다. 평생 넘을 수 없었던 벽을 넘어설 때까지…
        97-98년. 앞으로의 삶을 함께 할, 잃어버린 영혼의 일부를 만났다. 좋은 일 다음엔 나쁜 일이. 교회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면서, 사방이 가로막힌 벽을 느끼며 신학의 꿈을 접고, 시간을 벌기 위해 동양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98-2003년. 들판으로 나갔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분노와 상처로 대신 채웠다. 그러나 그분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파내려갔던 하나님 사랑의 우물은 가뭄의 세월을 충분히 견디게 해줄 만큼 깊었고,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하나님보다는 내 방법의 유혹이 자주 다가왔다. 유학의 꿈을 품었다. 결혼했다. 책임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었다. 3년동안 매년 같은 유학 장학금 시험에 낙방했다. 이번엔 될거야 했지만.. 아내의 사랑이라는 진통제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부모도 처가도 아내도 동료들도 친구들도 지도교수도 볼 낯이 없었다. 자신에게 실망했고 자존심은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날마다 새로운 것은 내 영혼의 어둠과 도무지 뿌리뽑을 수 없는 악한 본성뿐이었다.
        석사과정 유학은 한줄기 빛이자 유일한 돌파구였다. 동양사학도로서, 교회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던 성도로서.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학교에서는 과연 연이어 박사과정에 합격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교수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웠다. 떠났다고 생각했던 분야로 다시 돌아온 나에겐 자신 없었다. 돈도 없었다. 장학금이 필요했다. 교회. 비판 훈련으로 날카롭게 다져온 눈에는 문제투성이였다. 이곳에 임한다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사람들의 약함이라는 벽을 넘어 흘러넘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 영혼의 어두움과 상처들. 죄의 본성은 극복이 불가능한 산처럼 다가와서 마음을 답답하게 하였다.
        그분의 계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나갔다. 그분과의 영적 호흡. 죄와의 싸움.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먼저 찾아온 것은 재정의 채우심. 그토록 기다려왔던 장학금의 획득.
        다음엔 교회에 대한 마음을 다루셨다. 어느 가을밤 금요기도회의 어둠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다.
광훈아. 내가 너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네가 여태까지 알지 못한 영적 세계를 배우고 성장하게 하려 위함이다. 다른 교회에서도 너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네 관점에 맞는 교회, 부딪히는 부분이 없는 교회. 그러나, 네가 여기서만 배울 수 있는 것, 그곳에선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너는 이곳에서 현재까지의 상태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성취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내 삶을 그 말씀대로 빚어가기 시작하셨다. 이전까지 넘을 수 없던 교회 안의 벽들을 넘게 되었다. 마음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은혜를 받을 수 없던 부분들에서 은혜가 임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가고 평안을 채워 주셨다.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안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지난 몇 년동안 더 이상 상처입을 곳도 남지 않을 지경으로 너덜너덜해진 자존심. 이젠 새로 상처를 낼 부위도 남아있지 않다. 대학 입학으로 걱정 끝이라 생각하였으나 거듭된 실패만을 보며 한숨짓던 부모가 떠오른다. 나를 믿고 이곳으로 따라온 아내가 떠오른다. 사위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장모님이 떠오른다. 나의 성패를 주시하고 있을 동양사의 동료들이 떠오른다.
        그분의 말씀이 다가올 미래를 비추는 빛일까? 나를 자라게 하기 위해 이곳으로 부르셨다면, 그 말씀대로라면 이곳에 좀 더 있게 되지 않을까? 그래야만 말이 된다. 고작 6개월 뒤에 짐 싸서 떠날 놈한테 나의 계획이 어쩌구 하실 리는 없겠지. 그걸 붙잡았다. 믿음의 동지들에게 미리 말해 버렸다. 주신 말씀으로 보아 붙게 될 거라고.
        시간이 지나간다. 그날이 다가온다. 평안함 가운데 거하려고 애쓰지만 상처에 익숙하고 문드러진 마음은 어둠으로부터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빨리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
        
        2월 22일. 오전 5시 30분.
새벽기도회. 훨씬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저것 하다가 인터넷에 접속했다. 오늘 수업 때문에 메일 확인을 해야 한다. 지도교수로부터 메일이 와 있다.

Admissions decision.

쿵.

올 것이 왔구나.

메일 제목의 엄청난 압박감을 어서 벗어던져야겠다고 생각했을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존재를 건 한번의 마우스 클릭. 딸깍.
올해는 유난히도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지원하여 전례없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건 불합격 통지 용언데(많이 받아봐서 잘 안다).


당신의 합격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몇 년 동안에 걸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데는 눈물이 많이 필요했다.

아내가 말했다. 단번에 박사로 들어오지 않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기쁨도 석사 때, 박사 때로 두배 아니냐고.
군 제대 무렵 많이 하던 말이 입에서 나왔다.

두번은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

그러나, 군에서의 세월이 내 인생의 행복으로 기억에 남듯이, 하나님 사랑의 지워지지 않는 증거로 내 가슴에 새겨지듯이, 이날 또한 영원까지 남을 하나님과의 추억이 되리라.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또 벽 하나를 넘었다. 몇 년동안 나를 괴롭히던 실패의 벽.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다시, 아니 계속 그분의 숨결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달리고 있다. 박사과정의 이등병으로. 언젠가 그때처럼 넘어버릴 벽을 바라보며.

김경철

2007.04.16 13:45:36

이제야 다 읽었습니다. 헥헥...^^;; 긴 글 만큼 긴 여정의 삶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녹아있네요. 왠지 제 2의 '내려놓음'이 출간될 것 같은 예감 ^^

최성현

2007.04.16 14:12:20

저도 3편 다 읽느라 오늘 공부 마감했습니다..ㅋㅋ

김미선

2007.04.16 16:10:27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3장 12절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삶속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다시 기억해 봅니다.
지난번 출애굽기 성경공부때 아주 가슴에 남은 성경구절 하나가 바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이셨습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하나님이 우리 삶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도하신 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광훈

2007.04.17 13:10:00

김집사님, 최강도사님 감사합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찬찬히 하나씩 올려야 되는데 뒤로 미루다 아이 낳기 직전에 몰아치기 하느라 그리 됐어요. 김집사님의 요즘 교회 게시판 도배 모드에 동참해 볼까 해서.. ^ ^

여기까진 전에 쓴 글이고, 앞으로도 두세개 새 글을 올리려 합니다. 공부하시고 나서 노실 때 봐주세요.. ㅋㅋ

김미선 자매님, 말씀하신대로 하나씩 하나님과의 추억, 혹은 증거가 쌓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굳혀 주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란 결국 그런 추억/증거를 가능한 많이 경험하다 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추억들은 항상 뭔가 처절한 값을 치를 때 생겼는데, 점점 중독되어서 또 처절한 값을 치를지라도 더 원하게 되는 것 같네요. 힘빠질 땐 옛날에 모아둔 추억거리들을 하나씩 꺼내보면 마음이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곤 합니다. 제겐 그게 이렇게 글로 추억거리들을 담아두는 가장 큰 이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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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0년 웹사이트 리뉴얼이 있었습니다. [1] 웹지기 2010-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