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사랑.
우리가 자주 입에 담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정말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믿는 성경. 그 책은 하나님이 우리를,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사실 성경을 관통하는 흐름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 설득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게 확신 가운데 살 수 있나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그분의 사랑을 흔들림없이 누릴 수 있나요? 성경에 써 있는 남의 이야기만으로,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나요?

글쎄요.

그럴 수 있으시다면, 축하드립니다. 대단한 믿음 위에 서 있으시군요.
그러나,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분의 사랑을 더 원하고, 확인하고 싶고,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사랑을 원합니다.

또 한가지 궁금한 것..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권자시라면, 인도자시라면, 왜 내 삶의 모든 순간에 그분의 인도하심이 드러나지 않는가? 왜 삶의 대부분은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 묻힌 채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땅에서의 내 삶을 스쳐 지나가는가?

구역 모임 중에..
자신의 삶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는데, 이제 다음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분의 직접적인, 확실한 인도하심을 원하는데, 아무 말도 없으신 그분의 침묵 앞에 좌절감을 느끼는 지체가 있었지요.

잔뜩 기대했던 부흥회. 그러나 그분에게 기대하던 것들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퍽 상해 있던 지체가 있었지요.

이 이야기는 위의 질문들에 대한, 제 삶을 통해 몸으로 겪을 수 있었던 제 나름대로의 대답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그분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에 대해..

질투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분의 인도하심에 대해. 유치하다, 올바르지 않다라고 해도 할 수 없지요.
설령 아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제 갈망의 대상입니다. 그분의 사랑, 그 결정체로서의 인도하심. 그래서 몇 번 중요한 인도하심을 구한 것에 대해 우리 부부 중에 아내에게 음성을 들려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뭔가 서운했지요. 뭐야 이게. 기도는 내가 하고 음성은 마누라가 듣고. 하면서 말이죠.

그분의 음성 듣기 - 특히 중요한 삶의 결정을 앞두고 – 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제 삶에서 그런 직접적 인도하심에 따라 진로, 결혼 등의 방향을 잡아나간 일은 드물지요. 좀더 보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침묵. 그리고 다 지나간 다음에야 뭔가 깨닫게 되기.

그리고, 우리의 교회, 켐장에 오게 된 것 역시 뭔가 기대할만한 인도하심 덕분은 아니었지요. 그냥 먼저 유학온 과 선배가 다니던 교회였고, 도움을 받다 보니, 그리고 관계상 다른 교회에 가기가 무척 난감하다 보니(삐질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후훗) 코 꿰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어떻게 내가 켐장에 다니게 되었는가? 에 대한 이야기로 묶입니다.





박정관 목사.
제 영적 아비가 누구인지 꼽는다면, 이 분이 되겠지요. 저는 고3때 서울의 충신교회에 나가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연히 청년부를 1년동안 맡게 되시면서 이 분에게 많은 것을 배울 기회가 열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박정관 목사님 본인의 본과, 본인이 설립한 선교단인 다리놓는 사람들의 훈련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새 세상이 열렸지요.
기도회와 예배의 자리가 되어버렸던 청년부 임역원 회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능력을, 그분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된 그 1년.

이용규 집사, 아니 용규형.
대학 시절, 같은 학과 6년 선배 대학원생으로 만났습니다. 함께 처음으로 복음의 불모지같던 학과에서 기독인 모임을 시작했지요. 직업적 프로페셔널(목회자) 가운데 박정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웠다면, 직업적 아마추어(비목회자. 성도) 가운데서는, 교회 밖, 세상 속에서 이용규에게서만큼 하나님의 냄새와 위로를 강하게 맡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영역에서 제 배움의 본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켐장이 우연찮게도 이 두 사람이 거쳐갔거나 머무는 교회, 내가 인정하는 두 사람의 선택이라는 사실이 고민을 줄여 주었습니다. ‘박정관에 이용규라면, 뭐 더 볼게 있겠어’라는 생각.

켐장과의 첫 대면은 금요기도회였습니다. 첫인상이 좋았습니다. 숱한 기도와 눈물과 추억의 공간이었던 충신교회 기도실의 푸근한 어둠이, 그분의 임재가 그대로 이곳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규형의 은근한 압박+기대에, 기도회에서 맛본 그분의 임재를 더해 그냥 눌러앉게 되었지요.

그 뒤의 경험은.. 불쾌한 쓴맛을 보기도 했지요. 확, 더 늦기 전에 다른 교회로 옮겨야 되는거 아냐? 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용규형한테 컴플레인도 많이 넣었지요. 소비자가 제품에 대해 불만 신고/항의하듯이 말이죠. 이게 뭐죠? 속인거 아닌가요? 하고 말입니다.

2004년. 올해의 표어는 ‘갑절의 부흥을 주소서’ 였습니다. 속으로 피식 웃었습니다. 너무 뻔한 표어 아닌가. 어디 그대로 이루어지나 두고 볼까. 하나님께서는, 불만과 눈에 띈 문제 때문에 피폐해진 제 마음을, 저 때문에 켐장에 나오게 된 커플을 통해 붙들어 두셨습니다. 이런. 이 친구들 때문에 옮길 수도 없게 되었구만.

상황의 역전은, 2004년 가을의 수련회에서부터였죠. 불만으로 부글거리던 마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주신게 아니라,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가을, 어느 금요기도회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매우 오랜만에 제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이 곳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라고. 그 뒤로는 그 말씀이 스스로 움직여 제 삶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죠. 예배를 통한 감격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초점이 다른 사람들과 교회의 변화로부터 나의 변화로 옮겨갔습니다. 결국 2004년 연말 쯤에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함께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부부가 2004년 교회의 표어 말씀이었던 ‘부흥’을 받아 누린 수혜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의 부흥회. 마침 강사는 오랜만에 보게 될 박정관 목사님이었습니다. 기대하고 기도했습니다. 더이상은 켐장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이곳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손길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에 더욱.
부흥회. 한마디로 하자면, 나의 젊음, 그 첫사랑의 시절, 10여년 전의 그 순간, 그 장소. 충신교회 청년부의 추억을 다시 살아간 며칠이었지요. 그 말씀. 그 내용. 그 사람. 그리고 덤으로, 몇년만에 다시 접한 박정관 목사님의 말씀은 그때보단 많이 재미있고 여유로와지셨더군요. 진지하기만 한 말씀으로 서너 시간은 우습게 넘겨서 청년들을 질겁하게 만들던 그 시절.

부흥회 중에 어렵사리 박정관 목사님 가정을 집으로 모셔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받은 물건들이 많습니다. 식탁, 밥상, 책장, 책상 등..
그 중에 정사각형 한식 밥상이 하나 있는데, 다리가 하나 망가져서 끈으로 둘둘 말아놓은 상이지요. 어떻게 이삿짐들이 돌아다니다가 우리 집에 종착하게 되었는데, 괴이하게도 아무도 이게 누구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 편하게 차지하게 된 물건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차 한잔 하던 중.. 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을 바라보는 목사님 부부. “저희도 여기 살때 이런 상을 썼었지요”
“아, 이거요. 어쩌다 저희 집에 온 상인데, 누구 건진 정확히 몰라요. 근데 다리 하나가 고장나서 접히지 않지요.”
“어, 우리 상도 다리가 안 접혔었는데… 끈으로…”

그렇게 해서 박정관 목사님 가정이 쓰시던 밥상은 흘러흘러 우리 집까지 들어왔음을 알게 되었지요. 고장난 다리가 아니었으면 확증하기 어려웠겠죠.





밥상의 재발견이 시간을 뒤로 돌려 주었습니다.

2000년 한국, 우리 부부는 결혼 직전의 여름 수련회에서 마침 서울에 나와있던 박정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결혼 기도를 받았지요. 생각해보면, 그때 그는 켐장에 있었고, 내가 몇년 뒤 알게 될 많은 사람들과, 몇년 뒤의 나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될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고 있었겠지요.

켐장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질 호피 선교여행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몽골로 훨훨 날아가버린 용규 형도 켐장에서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구요. 당시 이십대 청년이던(뭐 아직도 젊지만) 김모 집사는 막 켐장에 와서 하나님을 새로이 만나고 있었고, 함께 켐장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조모 형제는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 싱글로 보스턴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있었겠지요. 이 두사람 다 이곳에서 결혼까지 하게 되리라고 꿈도 못 꾸던 2000년이었겠지요.

우리 부부는 앞으로 몇년간 펼쳐질 광야의 터널은 상상도 못한채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제 한국의 지도교수님도 이곳에서 일년을 보내고 있었고, 박정관 목사님 집에는 몇년 뒤 우리집에 와 있게 될 밥상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니, 누가 알고 있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지금 이렇게 켐장이라는 한 공동체 안에서 이런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박정관 목사님과는 이곳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없습니다. 2003년 가을, 마침내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국으로 떠나신지 1년이 넘은 시점이었지요. 용규형, 주현형수님 부부와의 시간도 겨우 1년이 남아 있었지요. 내가 가장 존경하며 따르던, 그리고 공교롭게도 모두 켐장을 거쳐간 두 사람 중 한 사람과는 아예 다시 만나지도 못했었고, 또 한 사람과도 1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여기서 그들로부터 뭘 배우거나 함께한다는 기대는 그다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허무하지요.

2005년의 부흥회. 우리 부부가 기대한 것이 그대로 채워진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뭐 눈에 띄게 손에 쥐게 된 것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기도로 준비했는데. 그러나, 그분의 은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씀. 좋았습니다.
아뭏든 내 영적 아비인 셈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그와의 기억을 다시 살면서 깨달은 것은, 켐장의 김영호 목사님을 통해 내가 이미 전보다 배불리, 깊이 말씀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굶다가 영의 양식을 먹는 자처럼 너무나 허겁지겁 막 먹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김영호 목사님으로부터 배불리 먹고 있어서 그리 아쉽지 않은 듯한 넉넉한 마음 상태로 부흥회 말씀들을 맞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지요..

그래서 부흥회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 별로 아쉽지가 않았습니다. 여기 켐장에서 배우게 될 것들에 대한 기대, 김영호 목사라는 통로를 통해 공급되는 말씀의 풍성함과 깊이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부흥회 말씀은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평소의 말씀들이 얼마나 빛나며, 내가 그것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주는 방식으로 제 마음에 은혜를 던져주고 갔습니다.

박정관과 이용규.
왜 이들과의 시간은 그토록 짧았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전의 그 두사람에 기대지 말고, 켐장의 김영호 목사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을 영적 스승으로 새로 모시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켐장에 온지도 2년 반이 된 이 시점에 이르러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온 15년동안, 이처럼 좋은 영적 스승들을 예비하고 만나게 하신 그분의 손길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며, 이곳에서 허락된 시간동안 최대한 뽑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지요.





밥상.
밥상은 밥을 먹는 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난지 얼마 안되던 스무살. 그때 저는 충신교회 박정관이라는 밥상에서 밥을, 나의 생명인 그분의 말씀을 먹었지요.
나름대로 산전수전 겪으며 맞은 서른살. 이제 저는 켐장 김영호라는 밥상에서 밥을 먹습니다.

왜 박정관 목사님이 쓰던 그 절름발이 밥상은 적지않은 켐장 식구들 가운데 제게 넘어왔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밥상을 차지했습니다. 누군가 보스턴을 떠나면서 넘기고 간 거라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나봐.. 히히 땡잡았다 하며. 그게 박정관의 밥상인줄은 꿈도 못 꾸고.

별로 튀지도 않는 인도하심(이라고 하기도 좀 뭣한, 그냥 상황) 가운데 켐장에 흘러들어왔습니다. 뭐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용규형 때문에, 박정관 목사님의 자취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지만. 2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야 보입니다. 들립니다.
밥상의 물림. 네가 박정관에게서 말씀을 먹었듯이, 김영호에게서 말씀을 먹고, 그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자라나라… 라는 그분의 음성이. 인도하심이.


결국, 이 이야기의 등뼈는, 언제나 제가 던지는 질문, “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의 기로에서, 더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으십니까?” 에 대한 하나님의 비껴가는 대답이십니다. “이렇게, 상황을 통해, 지나고 보면 재미있도록, 모든 조각이 맞아들어가도록 내가 일하고 있지 않느냐?” 라는.
이제는 제가 뭐를 더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그러나 재미는 조금 없을수 있는 인도하심인지, 아니면 좀더 힘들지만 지나간 뒤에 발견했을때 말할수없는 스릴과 흥분을 맛볼수 있는 그분의 당분간 침묵인지.

그리고, 결국 이것은 제가 이 교회로 인도하심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기로에 서서 고민하는 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직접적인 대답을, 지시하심을 원했으나 얻지 못하는, 그래서 좌절감을 느끼는 자들과 나누고 싶은 나의 삶. 그렇게 좌절했던 자로서…

아, 흔적을 남기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에, 하나님의 계획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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