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인 우리들이 회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무한히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탕자는 방황하는 동안 이것을 깨달았습니다:아버지의 집이 그렇게 풍족했었구나! 아버지는 탕자의 빈손에 놓여 있는 깨달음을 보셨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손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지 않았고 무엇을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지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았습니다. 탕자가 밖에 나가서 헤메던 기간이 탕자가 아버지에 대하여 깨달아 아는 기간이었고, 그리고 탕자가 가지고 나간 허비한 돈이 모두 그것을 깨달아 알기 위하여 지불한 레슨비였습니다.

둘째로 우리 하나님께서 형님 탕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안에서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은 군말 없이 했습니다. 아버지가 나간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냥 소처럼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일과에만 충실합니다. 그것도 즐거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뿐입니다. 아버지는 돈을 잃어 버렸지만, 그래도 둘째가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 것에 대하여 기뻐하지만, 그런 기쁨을 아들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형님도 탕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당신은 주의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기쁨 가운데서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형님 탕자에게 아버지가 했던 말이 오늘 우리들의 심령에 에코처럼 계속해서 들립니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 났으며 내가 잃었다고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말은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멸망을 피한 것이 못마땅했던 요나에게 우리 하나님이 했던 말과 같습니다: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보스톤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주님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아들도 말고 둘째 아들도 말고, 셋째 아들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셋째 아들은 가상적인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 탕자의 영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장남처럼 집을 떠나지 않고 안에서 열심히 아버지를 섬기는 아들이 셋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안에 남아 있으면서 영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그런 아들이 되라는 말입니다. 셋째 아들은 교회 안에서 기쁨이 없이 의무감으로 일하는 첫째 아들 타입의 성도를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둘째 아들 타입의 성도들도 불쌍히 여깁니다. 우리는 모두 셋째 아들이 되어서 매일 매일 우리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고 깨달아 가는 아들이 되어서 첫째 아들과 같은 성도에게 깨우침을 주어야겠고, 또한 둘째 아들과 같은 성도들을 찾아 내어서 교회로 인도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


켐연장

2017.09.05 05:41:21

2017년 9월 3일 주일예배 설교 음성 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0903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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