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제목:택한 다음 세대를 일으키소서!

본문:시71:18 

일시:2018년 1월1일 

대상:ckpc 


1. 서 론 또 한 해가 지났습니다. 나무는 나이테에 나무가 겪었던 경험을 고수란이 간직한다고 하지요. 우리들의 올해의 나이테에는 어떤 경험이 담겨 있을까요?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한 해가 어떤 한 해였는지를 표현하는 사자 성어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지성인이라고 일컬어 지는 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지난 한 해를 표현해 줄 사자 성어를 결정하지요. 작년도 2017년도 한 해의 상황을 나타내주는 사자 성어는 무엇이었을까요? 파사현정입니다. 파는 깨뜨릴 파자 이고, 사는 사악할 사입니다. 파사는 사악한 것을 깨뜨린다는 의미이지요. 현정에서 현은 드러낼 현이고 정은 바를 정입니다. 옳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대학 교수들이 선정한 2017년도의 사회상은 파사현정 이었습니다. 사악한 것을 파괴하고 올바른 것을 드러내는 한 해였다는 말입니다. 


2017년도 한 해 동안에 우리 한국 사회는 두 개의 큰 사건을 겪었습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 재판소의 파면 선고로 대통령이 파면을 당하여 대통령 직에서 물러 났습니다. 장관이 파면을 당하고, 차관이 파면을 당하는 일은 봤어도 최 고위 공직자인 대통령이 파면 당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은 다름 아닌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고 부른다지요. 이번 국정농단 사태로 인하여 구속 수감된 피의자만 해도 대통령 비서실장을 위시하여서 약 20명이나 달하고 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박근혜 행정부의 핵심 참모들이 거의 모두 구속된 그런 상황입니다. 전 정권의 참모 한 두 명이 구속되었다면 개인적인 일탈로 볼 수 있겠지만, 핵심 참모들이 무더기로 구속된 것을 보니 문제가 많았던 정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허수아비처럼 세워져 있었고, 동네 아줌마에 불과한 최순실과 그의 일당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불법적으로 운영했다는 데 대하여 국민들이 분노하면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통령 탄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헌재의 이런 판결문 앞에서 박수 치면서 좋아하는 무리들이 있는 가 하면 눈물 흘리면서 분노하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이 대한 민국 역사에 있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대통령 탄핵 사건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사건은 제 19대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5월달에 선거가 있었기에 그 선거를 장미대선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제인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취임했고, 5년 동안 나라를 이끌고 나가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문제인 행정부가 적폐 청산을 내세우면서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정치적 입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치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진보주의자들이 집권하던, 보수주의자들이 집권하던지 저와는 상관 없습니다. 다만 저의 관심은 대통령 이하 행정부가 불의를 청산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행사하지 않는 정권에 대하여서는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을 교회가 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 사회와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그것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예언적인 기능입니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리의 바람이고 교회의 바람입니다. 상처가 곪게 되면 째고 고름을 짜고 꿰매고 약을 발라 주면 상처가 아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쌓여 있는 불의와 폐단을 칼로 도려 내야 합니다. 칼로 도려 낼 때에 안 아플 수가 없지요. 그런 아픔을 참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아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처를 째고 꿰매 주는 일을 하지 않으면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사회가 불의와 죄악으로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픔을 견디면 적폐가 청산되겠지요. 다시는 그런 불의가 자행되지 않기 위하여 정부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하지요. 정치 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은 거기까지 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외면적인 정의를 만들어 가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내면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외형적인 정의를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적인 정의, 즉 마음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일을 교회는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부르짖는 적폐청산에 발 맞추어서 우리 교회도 이번 기회에 영적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에배소 교회에 주신 말씀이 더욱 우리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II. 지난 2017년도 한 해 동안,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소생케 하시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게 하소서'로 받아서 살았습니다. 그 표어는 경건했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과 삶을 본받아서 살아야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표어였습니다. 아래 세대로 내려 갈수록 영성이 흐려 지기 때문에 다시금 영성을 높이기 위하여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무척 힘썼습니다. 


2017년도는 다 지나갔습니다. 2018년도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삼 심이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삼 심은 뭡니까? 초심,열심,뒷심입니다. 우리들의 약점은 처음 마음으로 결심한 것을 끝까지 지속시키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1월 1일 새해 첫날에 작심하고 결정한 것을 올 한 해 동안 반복적으로 열심히 이루어 나가야 하고, 그것을 12/31일까지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뒷심도 필요합니다. 삼 심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초심입니다. 초심은 처음 그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 가짐을 가리킵니다. 초심이 있어야 열심도 나고, 뒷심도 나오지요. 초심이 없다면 열심도 뒷심도 없지요. 그래서 오늘 1월 1일 첫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세우는 이 시간 초심이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올 한 해 동안 켐연장 교회는 어떤 길을 달려 가야 합니까? 

2018년도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어는 '택한 다음 세대를 일으키소서!'입니다. 왜 켐연장 교회에 이 표어가 필요한가? 신앙은 기성세대인 우리들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손만대까지 전승되어서 우리의 후손들도 신앙이 주는 우리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따라 살았기에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가 있는데, 우리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우리의 손자들과 손녀들은 신앙에서 멀어져서 지옥에 들어가 있다면 정말로 우리들이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아니겠지요. 우리들과 함께 우리의 후손들도 모두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그런 축복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에 우리가 가진 믿음을 물려 주고 난 후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믿음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대로 물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2018년도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우리 하나님의 택한 세대로 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런 사역은 우리 교회만의 사역이 되어서는 안되고,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힘써야 하는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세대 동안 급속히 팽창하여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성장이 둔화되면서 교회는 급격하게 뒷걸음질 치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있는 교회들마다 젊은 층과 아동들이 급격하게 감소했습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한 세대 지난 다음에는 우리 한국 교회도 현금의 미국 교회처럼 큰 교회 건물 안에 몇 명의 노인들만 모여서 예배 드리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을 신앙으로 키워 놓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의 장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년들이나 노년들을 깨워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신앙을 물려 주는 더 더욱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아이들을 일깨워서 세워 놓지 않으면 교회는 미래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택한 다음 세대를 일으켜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린 다음에 우리는 일어나서 다음 세대를 일깨우고 믿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해야 합니다. 시 144편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들과 같으며! 우리는 우리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큰 나무로 키워 내야 하고, 아름답게 다듬은 큰 모퉁이 돌들로 키워내야 합니다. 그들이 큰 믿음의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되어서 그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회의 각 분야의 리더들이 되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전승시킬 것인가? 오늘 본문 시편 72:18절에는 시인이 후대에 그렇게도 전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힘과 능력을 무엇 하는데 쓰실까요? 우리를 구원하는 데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사입니다. 일반 역사는 똑딱 거리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져 갑니다. 그 일반 역사 속에 인류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서 건지는 구원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사용하여서 구원사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의 후 세대는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 아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우리의 후 세대는 알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래 세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세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아래 세대는 하나님과의 이런 깊은 관계 속에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예술도 잘하고, 무엇이나 다 잘하는 그런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세상에 있는 기술과 학문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래 세대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 아닙니다. 비록 그가 유치부원이나 초등부 부원이나 혹은 중고등부원 일지라도 예수 믿는 자라면 하나님은 나이에 관계 없이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요엘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젊은이들은 청년들이지요. 청년들은 환상을 본다, 그리고 나이 많은 성도들은 꿈을 꾸고, 그리고 자녀들은 무엇을 한다고요? 예언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꼬맹이, 즉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아이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무엇을 한다고요? 예언을 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노인들이나, 예수 믿는 청년들이나, 예수 믿은 어린 아이들에게 들어 가십니다. 성령께서 아이들의 심령 속에 들어 가는데, 부모들은 그것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나는 담임목사의 권위로 이런 부모들에게 권면합니다. 성령을 막지 말라고 말입니다. 부모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아니면 쓸데 없는 근심과 염려 때문에, 내 아이가 성령을 받아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은 기우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성령이 자기 아이에게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어리석음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성령이 충만하면 사무엘처럼 됩니다. 요즈음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보도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기도하는 중에 천사를 보기도 하고, 우리 주님을 보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기도 하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이런 차원 높은 영적 실존들과 교제를 가지게 되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고 높은 영성을 가지지 않을까요? 


우리 밖에 엄연히 살아 계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아동부 아이들이 경험하고, 또한 우리의 중고등부 아이들이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너희는 하나님을 알라 하면서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우리 밖에 하나님이 계심을 느끼고 알게 됩니다.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말리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발로 바다를 밟고 건너게 하셨고, 말과 기병들을 모두 홍해 바다에 수장시켰습니다. 또한 요단 강물을 말려서 구약의 성도들로 하여금 걸어서 요단 강을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출애굽과 또한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데 나타났습니다. 또한 어디에도 나타 났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났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서 우리 주님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예수의 부활 사건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도 경험해야 합니다. 한 세기 전에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된 무디 목사님은 대중들을 모아 놓고 대중 전도를 잘했습니다. 그는 대중 전도만을 잘 한 것이 아니라 개인 전도도 참 잘 했던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개인 전도하러 거리로 나갔습니다. 전도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 왔습니다. 사무실에 있는 스탭진들이 개인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무디 목사님께 오늘 전도 성과는 어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목사님이 오늘은 2.5명을 전도했다고 말했습니다. 2명이면 두 명, 세 명이면 세 명이지 2.5명이 무엇이냐고 스탭진들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스탭진들은 어른 두 명을 전도했고, 어린아이 한 명 정도 전도했는갑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랬더니 무디 목사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 두 명에 어른 한 명에게 전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복음을 받게 되면 한 평생을 헌신하게 되지만, 어른들이 복음을 받게 되면 반 평생 밖에는 헌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이 예수를 영접할 경우에는 한 평생을 헌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영접하는 것도 아이들이 노인들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세상 경험은 복음에 대하여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기가 힘들지요.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런 세상 경험이 아직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백지와 같습니다. 그 아이들이 훨씬 쉽게 복음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열어 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선교지에 나간다면 어른들을 선교의 대상인 타켓으로 삼기 보다는 아이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서 선교 하는 것이 비록 느리게 보이지만 훨씬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지요. 


III. 말을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이 넘쳐 납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미래가 있는 교회입니다. 어제 그저께도 우리 교회 지체의 가정에 예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키가 자라고, 정신세계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슬하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 모두가 우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어릴 때부터 경험하면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함으로써 우리 밖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를 닮아 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장년들이여, 우리 슬하에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가르치려 합니까? 힘과 능력.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봅니까? 30-40년 지난 다음의 영적인 거인이 된 그들의 모습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켐연장

2018.02.13 06:39:23

2018년 1월 1일 송구영신예배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1012018_NewYearDay.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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